1. 개요
2. 생애
1901년 전라북도 임실군 일도면(현 임실읍) 이도리[3]#에서 진재석(晋在碩)과 영천 이씨(寧川 李氏) 이극신(李極信)의 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4]. 경기중학교와 경성법학전문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고등연구과와, 대법과를 졸업하였다.
일정(日政) 때인 1922년에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인변호사 회장으로서 박열등의 독립투사에게 무료변론을 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임실군지부 위원장, 임실경찰 후원회장, 임실공립국민학교 후원회장. 임실군 축산협회장, 임실군 후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실중학교, 임실고등학교, 임실군교육청, 임실경찰서 등의 부지를 희사(喜捨)하여 지방발전을 도왔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전라북도 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기간동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헌법초안에 참여하여 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공로 국민장 224호가 추서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엄병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박세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죽었다. 묘는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 두치봉(斗峙峰) 사좌(巳坐) 구비갈 석물에 있다.
일정(日政) 때인 1922년에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인변호사 회장으로서 박열등의 독립투사에게 무료변론을 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임실군지부 위원장, 임실경찰 후원회장, 임실공립국민학교 후원회장. 임실군 축산협회장, 임실군 후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실중학교, 임실고등학교, 임실군교육청, 임실경찰서 등의 부지를 희사(喜捨)하여 지방발전을 도왔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전라북도 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기간동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헌법초안에 참여하여 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공로 국민장 224호가 추서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엄병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박세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죽었다. 묘는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 두치봉(斗峙峰) 사좌(巳坐) 구비갈 석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