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진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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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진선문 남쪽에 5칸 짜리 문을 세워 돈화문이라 했다는 기록이나# 금천교를 짓고 진선문 석교라고 한 것을 보아# 1411년(태종 11년) 이전에 지은 듯 하다.[1]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하였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일어난 몇 차례의 창덕궁 화재 때도 무난했던 듯 하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융희 2년) 탁지부건축사무소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시행할 때 자동차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헐었다. 광복 이후인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99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판의 글씨는 원래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1999년 복원할 때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2]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하였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일어난 몇 차례의 창덕궁 화재 때도 무난했던 듯 하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융희 2년) 탁지부건축사무소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시행할 때 자동차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헐었다. 광복 이후인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99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판의 글씨는 원래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1999년 복원할 때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2]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구조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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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선문을 들어서면 좌측(북쪽)에 인정문이, 정면(동쪽)에 숙장문이 있다. 이 문들은 서로 행각을 통해 붙어있으며 잇는 행각이 사다리꼴 모양을 만들어 마당을 이룬다. 이 마당도 인정전 마당처럼 국가 행사나 정치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주로 무게 있고 좀 더 근엄한 예제(禮制)를 열었다면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의 마당에서는 좀 더 일상에 밀착한 국사를 펼쳤다. 대표적으로 임금이 죄인을 심문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많이 활용한 예가 있다. 물론 엄숙한 행사를 아예 거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금의 즉위식을 주로 이 마당에서 열었다.
4. 여담
4.1. 복원 문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전경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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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제작한 《동궐도》 및 《동궐도형》과 20세기 초 진선문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진선문과 금천교는 일직선 상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축이 틀어져있어 복원을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해 복원은 제대로 했다. 진선문 복원 공사 당시에 다행히 기초 유구가 상당히 잘 남아있었고 이를 토대로 그 자리 그대로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진선문의 위치는 옛날 자리가 맞다.
그러면 왜 틀어진 걸까. 바로 금천교가 조선시대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덕궁에 순종이 살면서 자동차가 다녔고 차량 이동의 편의상 금천교를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 금천교 이건과 거의 동시에 진선문을 헐었다가 약 90여 년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해놓고 보니까 서로 축이 틀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