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 5대 황제
育德 죽득 | Duc Duc | ||
묘호
| 공종(恭宗)
| |
시호
| 관인예철정명혜황제
(寬仁睿哲靜明惠皇帝)[2] | |
능호
| 안릉(安陵)
| |
연호
| 없음[4]
| |
성씨
| 응우옌(Nguyễn, 阮/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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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푹응전(Phúc Ưng Chân, 福膺禛/복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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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기간
| 1852년 2월 23일 ~ 1883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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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1883년 (3일)
| |
1. 개요
2. 생애
서태왕(瑞太王) 응우옌푹홍이와 서태왕비(瑞太王妃) 레티응(黎氏應)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본명은 응우옌푹응아이(Nguyễn Phúc Ưng Ái, 완복응애)이다.
뜨득 22년 가을 9월(1869년 10월), 백부인 사덕제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응우옌푹응쩐으로 개명하였다. 황귀비(皇貴妃) 부티응에(武氏諧)가 양모가 되었다. 육덕당(育德堂)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지칭할 때 육덕당이란 말을 썼다.
뜨득 24년 4월 21일(1871년 5월 27일), 장청릉(長淸陵, 응우옌푹쭈)의 기일에 죽득이 홍고(紅袴)를 입고 조회에 나왔으므로 그 처벌로 봉록을 6개월 삭감하였고, 이전에 봉한 춘장공(春長公)의 작위를 없앴다.
뜨득 36년(1883년) 정월, 서국공(Thụy Quốc Công, 瑞國公)에 봉해졌다.
죽득은 뜨득의 양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에 대해 매우 친밀감을 표현하였으므로 뜨득은 그의 언행에 매우 불만을 품었고, 그를 황장자(皇長子)에서 폐한 후 가장 어린 양자인 양선당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자유태후(慈裕太后)가 반대하였다. 그해 6월, 뜨득이 중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양선당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부득이하게 죽득으로 하여금 제위를 계승하게 하였고, 쩐띠엔타인(陳踐誠), 응우옌반뜨엉(阮文祥), 똔텃투옛(尊室 說) 3인에게 보정(輔政)을 명했다.
그러나 3일 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쩐띠엔타인이 뜨득의 유조를 낭독할 때 죽득을 질책하는 내용을 감추었다고 비난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죽득이 제위 계승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뜨득의 동생인 낭국공(朗國公) 완복승을 대신 세웠다. 판딘풍(潘廷逢)은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파직당했다. 이에 응우옌푹홍젓이 뒤를 이으니 그가 협화제다.
응우옌반뜨엉, 똔텃투옛은 조정의 명의를 빌려 죽득의 황자 신분을 폐하고 건서군왕(建瑞郡王) 방(房)의 공자(公子)로 되돌렸으며, 이름도 응우옌푹응아이로 되돌렸다. 이어 그를 태의원(太醫院)의 강당(講堂)에 유폐하였다. 그해 9월,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최근 들어 위성아(衛城衙)의 수위가 엄하지 않고 진정군공(鎭定郡公) 응우옌푹미엔미에우의 아들 응우옌푹홍쭈옌(阮福洪甎)이 탈옥해 달아났다는 이유로 상서를 올려 죽득을 승천부(承天府)의 감옥으로 옮겨 유폐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죽득의 여러 자녀들도 각기 생모를 따라 외가로 돌려 보내 거주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건의들은 즉시 비준되었다.
응우옌반뜨엉은 몰래 감옥에 영을 내려 죽득에게 음식 공급을 끊도록 하였다. 9월 초엿샛날(10월 24일), 죽득은 결국 아사하였다. 죽득은 재위기간이 겨우 3일이었으므로 연호를 제정하지도 못했다. 후세에 그가 생전 거주한 후에 황성의 육덕당의 당호를 따서 그를 죽득 황제라고 부른다.
뜨득 22년 가을 9월(1869년 10월), 백부인 사덕제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응우옌푹응쩐으로 개명하였다. 황귀비(皇貴妃) 부티응에(武氏諧)가 양모가 되었다. 육덕당(育德堂)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지칭할 때 육덕당이란 말을 썼다.
뜨득 24년 4월 21일(1871년 5월 27일), 장청릉(長淸陵, 응우옌푹쭈)의 기일에 죽득이 홍고(紅袴)를 입고 조회에 나왔으므로 그 처벌로 봉록을 6개월 삭감하였고, 이전에 봉한 춘장공(春長公)의 작위를 없앴다.
뜨득 36년(1883년) 정월, 서국공(Thụy Quốc Công, 瑞國公)에 봉해졌다.
죽득은 뜨득의 양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에 대해 매우 친밀감을 표현하였으므로 뜨득은 그의 언행에 매우 불만을 품었고, 그를 황장자(皇長子)에서 폐한 후 가장 어린 양자인 양선당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자유태후(慈裕太后)가 반대하였다. 그해 6월, 뜨득이 중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양선당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부득이하게 죽득으로 하여금 제위를 계승하게 하였고, 쩐띠엔타인(陳踐誠), 응우옌반뜨엉(阮文祥), 똔텃투옛(尊室 說) 3인에게 보정(輔政)을 명했다.
그러나 3일 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쩐띠엔타인이 뜨득의 유조를 낭독할 때 죽득을 질책하는 내용을 감추었다고 비난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죽득이 제위 계승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뜨득의 동생인 낭국공(朗國公) 완복승을 대신 세웠다. 판딘풍(潘廷逢)은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파직당했다. 이에 응우옌푹홍젓이 뒤를 이으니 그가 협화제다.
응우옌반뜨엉, 똔텃투옛은 조정의 명의를 빌려 죽득의 황자 신분을 폐하고 건서군왕(建瑞郡王) 방(房)의 공자(公子)로 되돌렸으며, 이름도 응우옌푹응아이로 되돌렸다. 이어 그를 태의원(太醫院)의 강당(講堂)에 유폐하였다. 그해 9월,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최근 들어 위성아(衛城衙)의 수위가 엄하지 않고 진정군공(鎭定郡公) 응우옌푹미엔미에우의 아들 응우옌푹홍쭈옌(阮福洪甎)이 탈옥해 달아났다는 이유로 상서를 올려 죽득을 승천부(承天府)의 감옥으로 옮겨 유폐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죽득의 여러 자녀들도 각기 생모를 따라 외가로 돌려 보내 거주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건의들은 즉시 비준되었다.
응우옌반뜨엉은 몰래 감옥에 영을 내려 죽득에게 음식 공급을 끊도록 하였다. 9월 초엿샛날(10월 24일), 죽득은 결국 아사하였다. 죽득은 재위기간이 겨우 3일이었으므로 연호를 제정하지도 못했다. 후세에 그가 생전 거주한 후에 황성의 육덕당의 당호를 따서 그를 죽득 황제라고 부른다.
3. 사후 추서
동카인 을유년(1885년) 10월, 동경제가 그를 서원군왕(Thụy Nguyên Quận Vương, 瑞原郡王)에 추봉하고 시호를 장공(Trang Cung, 莊恭)이라고 하였다.
타인타이 2년(1890년), 죽득의 아들 성태제가 그를 공혜황제(Cung Huệ Hoàng Đế, 恭惠皇帝)로 추존하였고, 황고묘(皇考廟)를 세웠다.
타인타이 4년 2월 초하루(1892년 2월 28일), 황고묘가 완공되자 추존례(追尊禮)를 거행하였다.
타인타이 13년(1901년) 2월 15일, 성태제가 그의 묘호를 공종(Cung Tông, 恭宗), 시호를 관인예철정명혜황제(Khoan Nhân Duệ Triết Tĩnh Minh Huệ Hoàng Đế, 寬仁睿哲靜明惠皇帝)로 하였다. 또한 황고묘를 공종묘(恭宗廟)로 고쳤고, 뜨엉꽝사(祥光寺) 부근에 안릉(安陵)을 건조한 뒤 그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타인타이 2년(1890년), 죽득의 아들 성태제가 그를 공혜황제(Cung Huệ Hoàng Đế, 恭惠皇帝)로 추존하였고, 황고묘(皇考廟)를 세웠다.
타인타이 4년 2월 초하루(1892년 2월 28일), 황고묘가 완공되자 추존례(追尊禮)를 거행하였다.
타인타이 13년(1901년) 2월 15일, 성태제가 그의 묘호를 공종(Cung Tông, 恭宗), 시호를 관인예철정명혜황제(Khoan Nhân Duệ Triết Tĩnh Minh Huệ Hoàng Đế, 寬仁睿哲靜明惠皇帝)로 하였다. 또한 황고묘를 공종묘(恭宗廟)로 고쳤고, 뜨엉꽝사(祥光寺) 부근에 안릉(安陵)을 건조한 뒤 그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4. 가족
4.1. 아내
- 응우옌반티응에(阮文氏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