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제2차 울산 병영전투
第二次 蔚山兵營戰鬪 | ||
시기
| 1598년 1월 12일 ~ 1월 14일
(음력 1597년 12월 6일 ~ 1597년 12월 8일) |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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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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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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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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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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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마귀 천만리 | ||
병력 |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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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0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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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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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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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피해규모 불명
| 약 500 ~ 4000여 명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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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조명연합군의 경상좌도병영 · 울산도호부 탈환 및 울산지역의 거점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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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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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벌어졌던 당시 울산병영성의 현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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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때는 1598년 1월 12일(양력)으로, 당시 조명연합군이 경주지역을 완전탈환한 뒤에 전열을 재정비 후 울산 경상좌도 병영일대의 일본군과 2일에 걸친 전투이다. 이때 이 전투가 실패로 끝났으면 울산성 전투는 조금 뒤 또는 더 늣게 일어났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전투는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이 보낸 정탐병과 일부 작은 전투가 있었던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본군이 어느정도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는 병영성의 고지가 주변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과 병영성 서쪽의 산(고지)을 일본군이 미리 점령한 탓이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의하여 함월산에 있던 일본군은 대부분 울산성으로 후퇴하였다. 결국 병영성의 병력 2000명과 함월산의 병력 6000명이 고시니 유카나카 소속 일본군의 최전선이자 방어선이었다. 거기다가 울산병영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였다. 병영성의 성벽과 돌들도 울산왜성을 쌓으며 헐었기 때문에 함락은 예고되었던 결과이고, 일본군은 결국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퇴각하였다. 그리고 병영일대는 2일만에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되었다.
전투는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이 보낸 정탐병과 일부 작은 전투가 있었던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본군이 어느정도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는 병영성의 고지가 주변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과 병영성 서쪽의 산(고지)을 일본군이 미리 점령한 탓이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의하여 함월산에 있던 일본군은 대부분 울산성으로 후퇴하였다. 결국 병영성의 병력 2000명과 함월산의 병력 6000명이 고시니 유카나카 소속 일본군의 최전선이자 방어선이었다. 거기다가 울산병영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였다. 병영성의 성벽과 돌들도 울산왜성을 쌓으며 헐었기 때문에 함락은 예고되었던 결과이고, 일본군은 결국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퇴각하였다. 그리고 병영일대는 2일만에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