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예종의 왕자
인성대군 仁城大君 | ||
인성군(仁城君) → 인성대군(仁城大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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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孝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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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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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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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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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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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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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 ||
1. 개요
2. 생애
3. 사후
사망 후 할아버지 세조는 영순군 이부[7]와 윤사로, 정인지,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상지관을 데리고 정인사에 가서 장지를 고르게 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의경세자의 묘소 동쪽에 조성되었다. 그해 12월 4일에[8] 효소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되었다.
1472년(성종 3년) 4월 1일에[9] 인성대군(仁城大君)으로 승격되었다.
인성대군의 제사를 모시는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 1465년(세조 11년) 8월 15일에[10] 인성군의 제사를 평원대군의 사당에서 맡게 했다가 1470년(성종 1년)에 어머니 장순왕후의 혼궁으로 신주를 옮겼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순왕후의 신주가 종묘로 옮겨져 혼궁을 폐하자 갈 곳이 없어진 인성대군의 신주는 묘소에 묻고 속절에만[11]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1488년(성종 19년)에 다시 평원대군의 사당에 부제하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묘가 서삼릉의 비공개구역으로 이장되었다.
1472년(성종 3년) 4월 1일에[9] 인성대군(仁城大君)으로 승격되었다.
인성대군의 제사를 모시는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 1465년(세조 11년) 8월 15일에[10] 인성군의 제사를 평원대군의 사당에서 맡게 했다가 1470년(성종 1년)에 어머니 장순왕후의 혼궁으로 신주를 옮겼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순왕후의 신주가 종묘로 옮겨져 혼궁을 폐하자 갈 곳이 없어진 인성대군의 신주는 묘소에 묻고 속절에만[11]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1488년(성종 19년)에 다시 평원대군의 사당에 부제하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묘가 서삼릉의 비공개구역으로 이장되었다.
4. 여담
5. 가족과 후손
[1] 군호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따왔다.[2] 군호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따왔다.[3] 음력 10월 24일.[4] 세는나이 17세.[5] 음력 10월 24일.[6] 세는나이 3세.[7]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외아들. 인성대군에게는 당숙이다.[8] 음력 11월 5일.[9] 음력 2월 23일.[10] 음력 7월 24일.[11] 俗節. 제삿날 이외에 철을 따라 사당이나 선영에 차례를 지내는 날.[12] 인성대군 생전에 예종은 왕세자였다.[13] 다만 뜻이 뜻인지라, 전주 이씨 일부 족보에서는 숙(璛)이라는 비공식적인 휘를 쓴 족보가 있다.[14] 이 장면은 세조 재위 말년을 묘사한 것으로, 원손(인성대군)은 물론 장남(의경세자), 둘째 며느리(장순왕후) 등이 모두 요절한 것을 두고 효령대군(김인태 분)에게 한탄하는 장면이다.[15] 인성대군 생전에 예종은 왕세자였다.[16] 다만 뜻이 뜻인지라, 전주 이씨 일부 족보에서는 숙(璛)이라는 비공식적인 휘를 쓴 족보가 있다.[17] 이 장면은 세조 재위 말년을 묘사한 것으로, 원손(인성대군)은 물론 장남(의경세자), 둘째 며느리(장순왕후) 등이 모두 요절한 것을 두고 효령대군(김인태 분)에게 한탄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