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출전
流鬼去京師萬五千里, 直黑水靺鞨東北, 少海之北, 三面皆阻海, 其北莫知所窮. 人依嶼散居, 多沮澤, 有魚鹽之利. 地蚤寒, 多霜雪, 以木廣六寸․長七尺系其上, 以踐冰, 逐走獸. 土多狗, 以皮爲裘. 俗被髮, 粟似莠而小, 無蔬蓏它穀. 勝兵萬人. 南與莫曳靺鞨鄰, 東南航海十五日行, 乃至. 貞觀十四年, 其王遣子可也余莫貂皮更三譯來朝, 授騎都尉遣之.
유귀는 경사에서 1만 5천리 떨어져 있고 흑수말갈에서 곧장 동북쪽으로 작은 바다의 북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바다에 막혀있고 그 북쪽은 끝 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은 섬에 의지하여 흩어져 거처하며 습지와 못이 많고 바닷고기와 소금의 혜택이 있다. 땅은 일찍 추워지고 서리와 눈이 많으며 넓이가 6촌에 길이 7척인 나무를 사용하여 그 위쪽을 끈으로 매어 얼음 위를 걸어가고 짐승을 쫓는다. 그 땅에는 개가 많아서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든다. 풍속에 머리를 늘어뜨리며 곡식은 가라지와 흡사하나 그보다 작고 채소나 풀열매 및 별다른 곡류가 없다. 날랜 군사가 1만 명이다. 남쪽은 막예말갈(막예개말갈)과 인접하며 동남쪽으로 바닷길을 15일 항해하여 가면 닿는다. 정관 14년(640년)에 그들의 왕이 아들 "가야여막"을 보내 담비 가죽을 바치고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예방하니 기도위에 제수하여 보냈다.- 신당서 유귀전
3. 생활
서술로 보아 대체로 수렵 중심의 생활을 했으며, 세 차례나 통역을 거쳐야 했던 것으로 보아 당나라에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들의 고유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날랜 군사가 1만여 명', '왕'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해당 지역을 통솔할 정도의 힘은 갖췄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의 조공 기록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위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은 캄차카 반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돌출부 없이 올라가므로 동·서·남의 '삼면이 바다'인 곳은 한정되어 있다. 관련하여 등장하는 말갈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대략 유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5. 부여의 후손?
[1] 아이누와 관련 있는 민족이라는 학설도 있다.[2] 아이누와 관련 있는 민족이라는 학설도 있다.[3] 신당서 기록에도 '북쪽은 끝 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나온 것처럼,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는 부족이 사할린 섬 전체를 탐험하여 '이곳은 섬이다' 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북쪽에는 당장 바다가 안 보이니 땅이 죽 뻗어있겠거니... 하고 바닷길을 통해 주변과 교류했다면 섬을 반도로 오인하는 일이 쉽게 일어날수밖에 없다는 것.[4] 여기다가 위에 인용된 기록의 주어가 동사강목에는 유귀로 인용된 것까지 겹쳐[5] 유귀 - 담라 - 두막루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