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예수와 니고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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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예수와의 대화
2.1. 요한복음 3장 16절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다.[6]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고) -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닥칠 멸망을 피한다. 즉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 믿음으로써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특히 개신교에서 중요시하는 소극적 구원론인 이신칭의론의 근거 구절이다. 물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도 나온다.
가톨릭과 감리회의 공동 선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원이 믿음을 근거로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동을 강조하는 것일 뿐. 성경에서 '행동이 없는 믿음' 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나와 있으며, 야고보서에서도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2:24)"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2:26)" 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혁신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그 증거를 보인다. 행함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한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8][9][10]"
양동근의 노래 예수쟁이라는 곡에서도 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북미 프로레슬링의 전설인 스티브 오스틴의 그 유명한 'Austin 3:16' 의 3장 16절은 해당 구절에서 따온 즉흥 애드립이다. 근데 애드립답게 원래 구절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3. 그 후
[1]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이지, 환생이 절대 아니다.[2] 요한1서 4장 8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3] '보내주시다' 는 동사는 그리스어 '에도켄'의 번역.[4] 요한1서 4장 8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5] '보내주시다' 는 동사는 그리스어 '에도켄'의 번역.[6] 요한1서 4장 8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7] '보내주시다' 는 동사는 그리스어 '에도켄'의 번역.[8] 이국진 목사, <굿모닝 성경> 주석.[9] 알기 쉽게 말하자면, A는 B다. B라고 해서 무조건 A이지는 않다. (이 경우 바로 B이므로 A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후건 긍정의 오류.)[10] 행위(혹은 선행)가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가톨릭, 개신교 모두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선행의 중요성을 구원의 조건이라는 단순한 관점으로만 바라보니 '가톨릭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와 같은 주장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논쟁으로 개신교 교리와 가톨릭 교리의 가장 큰 차이점 3가지를 논하자면,
1. 몸(행함)과 마음(믿음)이 본질적으로 하나(가톨릭)라 보느냐 분리된 것(개신교)으로 보느냐
2.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칭의)(개신교)인가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의화)(가톨릭)인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가톨릭 교리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로워지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므로 언제라도 죄를 짓고 하느님과 멀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고 개인의 의지로 선행을 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1. 몸(행함)과 마음(믿음)이 본질적으로 하나(가톨릭)라 보느냐 분리된 것(개신교)으로 보느냐
2.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칭의)(개신교)인가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의화)(가톨릭)인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가톨릭 교리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로워지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므로 언제라도 죄를 짓고 하느님과 멀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고 개인의 의지로 선행을 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