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작위
| 입종 갈문왕
(立宗 葛文王) | |
별호
| 사부지 갈문왕
(徙夫知 葛文王) (徙夫智 葛文王) | |
골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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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 사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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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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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입종(立宗) / 사부(徙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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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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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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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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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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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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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徙夫知葛文王·徙夫智葛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사'는 음이 비슷한 '서'의 한자 '입立'을 쓴 것으로 보이고 '종宗'='부夫'인 것은 삼맥종(심맥부), 태종(이사부), 황종(거칠부) 등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의 신라어로 이름을 재현하자면 '사보(사부)' 또는 '서보(서부)' 정도가 될 것이다. '지'는 다른 신라 금석문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의 이름 끝에 붙이는 존칭 어미로 보인다. 부인은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다. 이 사람에 대한 행적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적어도 524년에는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으로 있었고, 법흥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어느 시점에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와 결혼하여, 534년에 삼맥종을 낳았고, 이후 숙흘종과 만호부인을 낳았고, 539년이후에 죽었다는 것이 된다. 다만 만호부인의 경우 539년생이라고 가정하면 534년생인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태자와 혼인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 수 없게 된다. 진흥왕이 성인이 되자마자 동륜태자를 낳았다고 가정해도 549년생으로 아내인 만호부인과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
깁입종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어느 정도 일조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의 경우 지증왕의 재위 기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왕실의 분란을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서 자신의 동생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인 사탁부의 수장으로 앉혀서 국정에 참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차후 왕위 계승에 대한 안정성까지 더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서 보면 적어도 524년에는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으로 있었고, 법흥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어느 시점에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와 결혼하여, 534년에 삼맥종을 낳았고, 이후 숙흘종과 만호부인을 낳았고, 539년이후에 죽었다는 것이 된다. 다만 만호부인의 경우 539년생이라고 가정하면 534년생인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태자와 혼인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 수 없게 된다. 진흥왕이 성인이 되자마자 동륜태자를 낳았다고 가정해도 549년생으로 아내인 만호부인과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
깁입종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어느 정도 일조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의 경우 지증왕의 재위 기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왕실의 분란을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서 자신의 동생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인 사탁부의 수장으로 앉혀서 국정에 참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차후 왕위 계승에 대한 안정성까지 더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되겠다.
3. 기타
[1] 법흥왕의 생년으로 역산 한 것이다.[2]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따르면 539년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540년인데 그 사이에 사망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삼국사기에 사망 관련 기록도 없고, 시간이 워낙 촉박한 감이 있다. 무엇보다 입종의 손자인 동륜태자가 입종의 딸인 만호부인과 결혼하는 비정상적인 혼인양상을 보이는 점을 보면 진흥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생존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3] 법흥왕의 생년으로 역산 한 것이다.[4]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따르면 539년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540년인데 그 사이에 사망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삼국사기에 사망 관련 기록도 없고, 시간이 워낙 촉박한 감이 있다. 무엇보다 입종의 손자인 동륜태자가 입종의 딸인 만호부인과 결혼하는 비정상적인 혼인양상을 보이는 점을 보면 진흥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생존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