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생애
1892년 6월 24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학산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측량을 공부했으나, 이왕직에서 운영하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웠고, 결국 이왕직(조선 왕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최후의 어진을 그렸다는 것도 이왕직 시기 순종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경술국적 중 한명인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도였다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6개월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온 이후부턴 일제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창씨개명도 하였는데, 이때 생긴 이름은 츠루야마 마사시노기(鶴山殷鎬)이다. 성인 츠루야마는 아마도 그의 고향인 학산리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6개월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온 이후부턴 일제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창씨개명도 하였는데, 이때 생긴 이름은 츠루야마 마사시노기(鶴山殷鎬)이다. 성인 츠루야마는 아마도 그의 고향인 학산리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친일 행적 중에서 〈금차봉납도〉가 가장 유명하다.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 부인 등이 주축을 이룬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가 결성식 날, 조선군 사령부 후카자와 중장에게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기지개 각각 2개 ,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헌납하였는데, 〈금차봉납도〉는 이 광경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은호가 2개월 동안 노력한 역작이다. 이 작품은 김복수[6]와 애국금차회 간부들의 손을 거쳐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되었고 총독부 내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걸어두는 동시에 엽서로 인쇄하여 황군위문대에 보내기도 했었다. 이 사실은 당시 기사(『매일신보』, 1937.11.21)에 실렸다.
광복 후에는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맡으며, 국내 미술계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이는 그의 제자이자, 역시 친일을 한 김기창이 김은호의 뒤를 이은 것과 더해져서 상당 기간 친일 행적이 쉬쉬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특징
4. 작품
5. 여담
[1] 제적등본상 출생일과 사망일. 출처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4부 3권 735권 ~ 736쪽.[2] 금비녀(금차, 금채)를 헌납하는 것을 말한다. 신문에서는 '금차헌납'이라고 나오는데, '금차봉납'이나 '금차헌납'이나 뜻은 같다.[3] 나아가서 드린다는 뜻.[4] 금비녀(금차, 금채)를 헌납하는 것을 말한다. 신문에서는 '금차헌납'이라고 나오는데, '금차봉납'이나 '금차헌납'이나 뜻은 같다.[5] 나아가서 드린다는 뜻.[6] 친일파 윤덕영의 부인이다. 애국금차회의 회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