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생애
1964년 광주제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자퇴하였고, 1969년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함성》을 제작했고, 이 사실이 드러나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되었는지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조금씩 시를 발표하였으며, 1975년에는 광주로 올라와 잠시 서점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폐업하였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1]
당시 남민전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김정익은 자신의 저서 '수인번호 3179'에서 김남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김남주가 증오를 조장하고 대학살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위험한 사고를 가진 비정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남민전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김정익은 자신의 저서 '수인번호 3179'에서 김남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김남주가 증오를 조장하고 대학살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위험한 사고를 가진 비정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상황에서 그의 시집들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교도관의 도움이 컸다. 평소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 등에 손톱 등으로 꾹꾹 눌러 시를 쓰면, 교도관이 남몰래 시인의 아내[2]에게 전해 줬다고. 그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인 <진혼가>가 1984년에 출간됐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1994년 2월 13일에 췌장암으로 서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서 사망했다.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3. 시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1」 中
교도소에 있을 때 쓴 시 중 '사랑1'라는 작품이 있는데, 위의 구절이 인상깊었던 독자가 후일 '감옥 안에서 어떻게 이런 구절을 썼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남주는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니 (씨방의 모양이) 하트모양이라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4. 여담
- 슬하에 1남을 두고 있었다. 이름을 특이하게 '토일(土日)'이라 붙였는데, 성과 합치면 김(금)토일(金土日). '월화수목금토일'의 마지막 세 글자 맞다. 노동자가 금/토/일요일에는 휴일을 누려야 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그의 모교였었던 전남대학교에서는 2019년 신설 중인 전자도서관에 김남주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2019년 7월 14일 조국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올리며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