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금화시민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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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명칭
| Geumwha Citizen A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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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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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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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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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
| 130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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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수
|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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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수
| 2,000세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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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대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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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46㎡, 59㎡,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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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
| 다수
| |
1. 개요
2. 세대
3. 역사
3.1. 시민아파트 시대의 개막
1960년대 이후까지 전후 빈민들로 골치를 앓아왔던 서울특별시에서는 이제까지 서민들이 살아왔던 판자집과 달동네를 밀어내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서민들을 수용하고자 했다.
그 때문에 시민아파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금화시민아파트는 그 첫 주자격으로, 제일 먼저 완공된 프로토타입 포지션의 시민아파트였다.
금화산 판자촌을 밀어내고 그 위에 지었던지라 공사 때부터 토반이 무너져 내려 아래 판잣집 주민들이 깔려죽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전망에서 청와대가 잘 보였던지라, 왜 이런 곳에 짓느냐는 간부의 질문에 그 유명한 김현옥의 "아 이 새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보이는 산 중턱에 지어지게 된다.그리고 망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린벨트, 군사보호구역, 국유지이던 산을 쓰면 철거 및 토지 보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산 문제.
여튼 1969년 4월 21일 1차 완공, 입주를 시작했다. 그해 말 2차 입주가 시작되었고, 130동 전체 완공은 1970년~1971년 사이였다.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109976_10116.jpg_M534.jpg
준공식.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김현옥 서울시장 등이 참석해 치러진 이 행사에는 많은 관료들이 대동해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 없어 보였던 이 아파트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시민아파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금화시민아파트는 그 첫 주자격으로, 제일 먼저 완공된 프로토타입 포지션의 시민아파트였다.
금화산 판자촌을 밀어내고 그 위에 지었던지라 공사 때부터 토반이 무너져 내려 아래 판잣집 주민들이 깔려죽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전망에서 청와대가 잘 보였던지라, 왜 이런 곳에 짓느냐는 간부의 질문에 그 유명한 김현옥의 "아 이 새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보이는 산 중턱에 지어지게 된다.
여튼 1969년 4월 21일 1차 완공, 입주를 시작했다. 그해 말 2차 입주가 시작되었고, 130동 전체 완공은 1970년~1971년 사이였다.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109976_10116.jpg_M534.jpg
준공식.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김현옥 서울시장 등이 참석해 치러진 이 행사에는 많은 관료들이 대동해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 없어 보였던 이 아파트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3.2. 수난과 말로
프로토타입답지 않게 사고가 상당했다. 사실 프로토타입 항목에서 보듯이 프로토타입이 더 안 좋다. 근데 시민아파트는 다 안좋은데
환풍시설이 없어 입주 첫 해부터 입주민들이 보일러로 인한 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1970년에는 통풍이 안된다고 입주민들이 문을 다 열어놓고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3]
그 외에도 처음 지었을 때부터 수도시설이 빈약했다. 아파트를 산에 지었는데 거기까지 수도관 압력이 닿지 않았던 것. 1971년에는 수도 시설을 갖고 패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으니 뭐...대부분의 시민아파트에는 집집마다 어른 한두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뚜겅이 달린 고무 물통이 있었다. 수압이 낮은 낮엔 수돗물이 거의 안 나와서 그나마 졸졸졸이라도 나오는 밤에 물을 받아 놓고 낮에 퍼 썼다.[4]
그리고 지은 지 1년 만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시민아파트의 부실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1970년 4월 20일 첫 철거를 시작으로 매년 몇개 동씩 철거하더니 서대문 형무소 뒷편에 있던 2차, 3차 단지는 80년대 중반에 이미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그후 90년대에 2차, 3차 단지 나머지가 완전히 철거되었고 1968년 지어진 1차분은 2001년에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후 대한주택공사에서 그 자리에 천연뜨란채아파트가 지어졌다.[5]
2002년 즈음에는 시범단지 2개동(3동/4동)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머지 2개 동은 철거에 대한 철거 발표와 번복이 엄청나게 있었다. 이전부터 나머지 철거 떡밥은 끊임없이 나돌았으나, 시에서도 철거한다 했지만 이내 보상문제 등으로 번복하기 일쑤였고, 재개발지역에 포함시켜도 재개발 등이 무산돼서 철거를 못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2007년, 남은 2개 동은 북아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토지 소유주[6]와의 실랑이 끝에 8년을 끌어 2015년 8월에야 철거되었다. 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회현시민아파트가 유일하게 되었다.
환풍시설이 없어 입주 첫 해부터 입주민들이 보일러로 인한 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1970년에는 통풍이 안된다고 입주민들이 문을 다 열어놓고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3]
그 외에도 처음 지었을 때부터 수도시설이 빈약했다. 아파트를 산에 지었는데 거기까지 수도관 압력이 닿지 않았던 것. 1971년에는 수도 시설을 갖고 패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으니 뭐...대부분의 시민아파트에는 집집마다 어른 한두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뚜겅이 달린 고무 물통이 있었다. 수압이 낮은 낮엔 수돗물이 거의 안 나와서 그나마 졸졸졸이라도 나오는 밤에 물을 받아 놓고 낮에 퍼 썼다.[4]
그리고 지은 지 1년 만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시민아파트의 부실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1970년 4월 20일 첫 철거를 시작으로 매년 몇개 동씩 철거하더니 서대문 형무소 뒷편에 있던 2차, 3차 단지는 80년대 중반에 이미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그후 90년대에 2차, 3차 단지 나머지가 완전히 철거되었고 1968년 지어진 1차분은 2001년에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후 대한주택공사에서 그 자리에 천연뜨란채아파트가 지어졌다.[5]
2002년 즈음에는 시범단지 2개동(3동/4동)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머지 2개 동은 철거에 대한 철거 발표와 번복이 엄청나게 있었다. 이전부터 나머지 철거 떡밥은 끊임없이 나돌았으나, 시에서도 철거한다 했지만 이내 보상문제 등으로 번복하기 일쑤였고, 재개발지역에 포함시켜도 재개발 등이 무산돼서 철거를 못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2007년, 남은 2개 동은 북아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토지 소유주[6]와의 실랑이 끝에 8년을 끌어 2015년 8월에야 철거되었다. 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회현시민아파트가 유일하게 되었다.
3.3. 후일담
[1] 충정로2가 67-105[2] 충정로2가 67-105[3] 집이 좁아 답답하기도 하고 건물이 부실해 단열이 안 되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는데, 극히 일부 몇 집을 빼곤 에어콘을 들여 놓을 형편이 아니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거의 문을 열어 놓고 지냈다. 다행인 건 단지가 대부분 산 위에 있다 보니 대문과 창문을 열면 바람이 잘 통해 시원했다. 그리고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온난화 이전이라 여름이 많이 덥지 않았고, 장마가 길었으며, 혹서기가 짧았다. 대신 겨울엔 매우 추웠다.[4] 예외는 (거의)전용 상수도 가압펌프장이 있던 종로구 누상동의 옥인아파트.[5] 근처에 천연동주민센터가 있다.[6] 처음에 시영 부지였는데 나중에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