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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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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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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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해남옥동초-화순중-순천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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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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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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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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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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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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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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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로 시절
순천상고를 졸업한 뒤[2] 1989년에 입단한 후 2군에서 꾸준히 실력을 키워 오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서 활약했다. 최고 구속이 135km/h로 야구 선수로서는 다소 불리했으나, 타자와의 수싸움에[3] 진가를 발휘하며 자리를 잡아갔던 것. 1995년부터는 선수 달력에서도 제법 크게 사진이 실리는 등 비중이 부쩍부쩍 늘어났다. 2001년 은퇴할 때까지 '왕조'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함께한 선수.
통산 성적은 16승 24패 6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39. 커리어하이는 1995년. 십년을 넘게 뛰었음에도 차명석이나 방수원처럼 홀드가 늦게 집계되어 성적에서 꽤 손해를 본 케이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16승 24패 6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39. 커리어하이는 1995년. 십년을 넘게 뛰었음에도 차명석이나 방수원처럼 홀드가 늦게 집계되어 성적에서 꽤 손해를 본 케이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3. 투구 패턴
4. 여담
[1]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2] 당시 동기생이 조웅천이었고, 둘 다 팀의 간판 미들맨이었던지라 현대와 해태가 맞붙은 1996년 한국시리즈나 홀드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0년에 조웅천과 강태원을 라이벌로 엮은 기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3] 상단의 사진에서 보듯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1류 도박사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자들과 머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선수였다는 것.[4] 이 무렵이 김응용 감독이 "타자로 대성할 선수"라며 이 선수에게 애정어린 갈굼을 시전하던 시기. 나중의 갈등과는 별개로 "대성할 수 있었는데, 술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며 인터뷰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한 바 있다.[5] 이병훈이 해설가로 활동할 무렵 이 일화를 얘기하며, "우리 마누라도 강태원 구종이 OO개인거 다 알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6] 강태원이 1971년 5월생이고 김성한 감독이 2001년에 취임했으니, 이제 갓 서른 넘겼을 때 생긴 일이다.[7] 강태원이 1971년 5월생이고 김성한 감독이 2001년에 취임했으니, 이제 갓 서른 넘겼을 때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