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 |
출생 | |
사망 | |
묘소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 동림마을 |
상훈 | 건국포장 |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홍영우는 1890년 2월 5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남서헌(南棲軒) 홍기수(洪箕修)와 어머니 현풍 곽씨 곽종우(郭鍾瑀)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경, 1924년이면 조선이 독립된다는 홍재훈(洪在燻)의 권유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 50원을 납부하였으며, 보천교 충청·경상도책으로서 이기식(李基植) 외 여러 명에게 입교를 권유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200일 포함)을 언도받았다.# 홍영우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3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재차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상고를 취하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에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9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경, 1924년이면 조선이 독립된다는 홍재훈(洪在燻)의 권유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 50원을 납부하였으며, 보천교 충청·경상도책으로서 이기식(李基植) 외 여러 명에게 입교를 권유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200일 포함)을 언도받았다.# 홍영우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3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재차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상고를 취하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에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9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