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세자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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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조 조선 왕세자
폐세자 로[2] | 廢世子 𩔇
왕세자 → 폐세자
전주(全州)
로(𩔇)[4]
부왕
모후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재위
기간
조선 왕세자
1502년 10월 15일 ~ 1506년 9월 18일
(3년 11개월 3일 / 1,435일)
생몰 기간
1498년 1월 10일 ~ 1506년 10월 10일
(8년 9개월 / 3,196일)
1. 개요2. 생애
2.1. 중종반정 이후
3. 사망 이후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연산군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남으로 총명하고 어진 기질을 보여 연산군의 학정에 시달리던 여러 신하들의 기대를 모았었다.

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여 납징[5]까지 하였지만 길례 전에 반정이 일어나서 정식 세자빈이 되진 못했다.[6] 다행히 납징까지 했으니 준세자빈과 같다고 여겨 평생을 수절하게 하거나 혼삿길이 막히지는 않아 그 후 정세명의 딸은 강희신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2. 생애

야사에서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박원종이 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기다리면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이후에 연산군이 폐위될때 정선으로 유배를 갔다가 사사된다. 요(夭) 10세.

친동생 창녕대군, 이복동생 양평군, 돈수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가 같은 전철을 밟았다.

2.1. 중종반정 이후

아래는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5일 신사 5번째 기사로 유배를 갈 때의 기사이다.

박원종 등이 아뢰기를,

“폐세자 및 창녕(昌寧)·양평(陽平) 등이 성밖 가까이에 있어서는 온당하지 못하니, 외진 군읍을 골라 안치하고 관에서 먹는 것을 주며, 잡인 출입을 금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로(𩔇)는 정선(旌善), 인(仁)은 수안(遂安), 성(誠)은 제천(堤川), 돈수(敦壽)는 우봉(牛峯)에 보내어 모두 관가 근처에 안치하되, 그 담을 높직이 쌓고 항상 문을 잠그게 하소서. 그리고 옷과 먹는 물품의 출납은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감독 관장하게 하고 그 공급은 소재처 관창(官倉)의 쌀로 하되, 관노비(官奴婢)를 시켜 음식을 마련하며, 또 군사로 하여금 수직(守直)하게 하고, 일이 있건 없건 수령은 매월 월말에 관찰사에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원래는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반정공신들이 폐주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고 죽일 것을 청하였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고 만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4일 경자 3번 째 기사.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 부원군 유순정·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폐세자 로(𩔇)·창녕 대군 성(誠), 양평군 이인(仁) 및 돈수(敦壽) 등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또 연산군의 폐비 신씨가 지금 정청궁(貞淸宮)에 있는데 선왕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동대문 밖 광평 대군(廣平大君) 집에 옮겨 안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로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 폐비는 스스로 허물이 없는데, 문밖으로 내쳐 보내기가 정의상 몹시 가련하니, 성안에 옮겨 안치한다고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로 등의 일을 전하께서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이니,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비록 인심이 이미 정하여졌으나, 원대한 염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모름지기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 폐비는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옮겨 두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폐비는 그렇게 하고, 로 등은 나이 연약하고 형세가 고단하니, 비록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큰일이니,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써 대체(大體)에 누가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야 합니다. 이는 신 등의 뜻일 뿐만 아니라 곧 일국 신민의 뜻입니다. 신 등이 전하께서 차마 못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마지못하여 감히 품달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로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하였다. 명하여 로·성·인·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

3. 사망 이후

중종은 죽은 조카들을 안타까이 여겨 장례라도 후하게 지내주려 하였으나,[7] 반정 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 없으니 덧널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당시 폐세자 로의 나이가 10세였다는 걸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이 불안해 했고 또 그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후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로보다 더 많았고 광해군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단 나중에는 죽이는데, 그 이유마저도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8] 로 역시도 행동이 반듯하고 나이도 더 어렸는데도 사사시킨 걸 보면[9]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10] 나중에 중종은 박원종에게 어느 정도 야속감이 있었는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11]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말하기를 "이자가 공신에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거절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



[1] 현대에는 완전히 잊힌 원칙이지만 본래 태자 뒤에는 성씨를 생략한 채 이름만 넣고 종친작위 뒤에서는 이름만 쓰며 이것은 다른 나라의 다른 왕조에게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 일본 황실류리크 왕조가 성씨 없이 이름만 있는 것을 연상한다. 조선왕조실록이든 고려사24사든 원문을 읽어보면 이런 원칙을 따름을 알 수 있다.[2] 현대에는 완전히 잊힌 원칙이지만 본래 태자 뒤에는 성씨를 생략한 채 이름만 넣고 종친작위 뒤에서는 이름만 쓰며 이것은 다른 나라의 다른 왕조에게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 일본 황실류리크 왕조가 성씨 없이 이름만 있는 것을 연상한다. 조선왕조실록이든 고려사24사든 원문을 읽어보면 이런 원칙을 따름을 알 수 있다.[3]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조차 이 글씨의 소리를 황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글씨의 왼쪽에 있는 황(皇)에 이끌린 속음이다. 강희자전광운을 따와서 이 글씨의 반절이 로호절(盧皓切)로 소리가 로(老)와 같다고 하였고 정자통을 따서 고로절(古老切)이란 다른 반절을 소개하면서 이 글씨가 𩕍가 와전된 글씨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 글씨의 소리는 로 또는 고가 맞으며 뜻은 광운이든 정자통이든 모두 넓고 큰 모양이라고 풀이하였다. 출처[4]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조차 이 글씨의 소리를 황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글씨의 왼쪽에 있는 황(皇)에 이끌린 속음이다. 강희자전광운을 따와서 이 글씨의 반절이 로호절(盧皓切)로 소리가 로(老)와 같다고 하였고 정자통을 따서 고로절(古老切)이란 다른 반절을 소개하면서 이 글씨가 𩕍가 와전된 글씨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 글씨의 소리는 로 또는 고가 맞으며 뜻은 광운이든 정자통이든 모두 넓고 큰 모양이라고 풀이하였다. 출처[5] 주대(周代) 혼례의 육례(六禮) 가운데 4번째 절차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어 혼약(婚約)의 성립을 증거하는 예식이다.[6] 하지만 대간들은 정씨를 폐세자빈으로 칭하는것을 보아 당대에는 연산군이 직접 로의 세자빈으로 지목했고 납징까지 간 정씨를 세자빈으로 보았던 것 같다.[7] 사실 도리상 이게 맞긴 하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 데 죽였다면 적어도 장례쯤은 후하게 치뤄주는 게 예의다. 실제로 진짜 죽을짓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찍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장희빈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루게 했다.[8]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9]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 받은 게 거의 전부다.[10] 사실 핵심부들은 모두 다 연산군 밑에서 한자리 했었던 사람들이다. 유자광부터가 무오사화의 주역이다.[11]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