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탐라국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한 문서.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2. 삼국시대[편집]
- 508년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와 통교했다.[C]
3. 삼국통일전쟁[편집]
4.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편집]
- 678년 8월 28일 왕자 도라가 일본에 조공했다.[C]
- 679년 1월 22일 탐라인이 일본의 수도로 향했다.[C]
- 679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했다.[A]
- 680년 9월 23일 탐라에 왔던 일본 사신이 돌아가 일본 조정에 인사했다.[C]
- 685년 10월 3일 일본에서 사신을 보냈다.[C]
- 686년 8월 20일 일본 사신들이 탐라에서 귀국해 본국에 도착했다.[C]
- 688년 8월 25일 탐라왕이 좌평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9월 23일 츠쿠시관(筑紫館)의 연회에서 물품을 받는다.[C]
- 778년 11월 10일 탐라도(耽羅嶋) 사람들이 일본 견당사를 노략질하고 억류했다. 녹사 등 40여명이 일본으로 도망쳤다.[E]
- 779년 2월 일본에서 태재부(太宰府) 관원을 신라에 보내 탐라도에 억류된 견당판관(遣唐判官) 등을 데려가려 했다.[E]
- 801년 10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A]
- 925년 11월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5. 고려시대[편집]
탐라국이 국가로서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시점을 언제로 보는가 하는 견해는 938년설부터 1104년설까지 다양하다.
- 938년 12월 탐라국 태자 말로가 고려에 입조하고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았다.[B]
- 1012년 8월 7일 탐라인이 고려에 큰 배 두척을 바쳤다.[B]
- 1021년 7월 3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2년 2월 9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4년 7월 27일 고려에서 추장 주물(周物)과 그 아들 고몰(高沒)을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했다.[B]
- 1027년 6월 15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9년 6월 26일 세자 고오노(孤烏弩)가 고려 조정에 입조하고 유격장군의 관직과 관복 한벌을 받았다.[B]
- 1030년 9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36년 11월 15일 고려에서 팔관회를 열자 방물을 바쳤다.[B]
- 1043년 12월 27일 탁라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加利)가 고려에 왕자를 새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했다.[B]
- 1049년 11월 13일 진위교위 부을잉(夫乙仍) 등 77명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56년 2월 27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62년 2월 27일 고협(高叶)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10월 6일 성주 고일(高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63년 3월 9일 탐라의 새 성주 두량(豆良)이 고려에 입조해 명위장군의 관직을 받았다.[B]
- 1068년 3월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加也仍)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77년 12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92년 2월 26일 성주 의인(懿仁)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고려에서 의인을 정원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관복과 의대를 하사했다.[B]
- 1095년 7월 20일 고물(高勿) 등 80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0년 11월 16일 송상, 여진과 함께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1년 10월 8일 고려에서 탁라의 새 성주 배융부위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에 임명했다. 11월 14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5.1. 탐라현 시기[편집]
- 1153년 11월 15일 탐라현의 도상 인용부위 중련(中連), 진직(珍直) 등 12인이 방물을 바쳤다.[B]
- 1168년 11월 20일 양수(良守)가 반란을 일으켰다.[B]
- 1202년 10월 번석(煩石)과 번수(煩守)가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5일 탐라안무사가 진압하고 수괴를 처형했다.[B]
5.2. 원간섭기[편집]
[A] 1.1 1.2 1.3 1.4 1.5 1.6 1.7 『삼국사기』.[C] 3.1 3.2 3.3 3.4 3.5 3.6 3.7 3.8 3.9 3.10 3.11 3.12 3.13 3.14 3.15 『일본서기』.[4] 『북사』. 『수서』에서는 탐모라(𨈭牟羅)라고 한다.[7] 『당회요』.[8] '유리'가 성이고, '도라'가 이름이다. (『당회요』)[9] 『책부원귀』.[11] 이원진(李元鎭), 『탐라지』.[D] 12.1 12.2 『구당서』 유인궤전.[19] 본 사료에서는 그 나라 좌평에 해당한다(當其國之佐平位)고 서술했는데, 사실 대을상은 19관등 중 15위로 낮은 편이다.[E] 30.1 30.2 『속일본기』.[B] 33.1 33.2 33.3 33.4 33.5 33.6 33.7 33.8 33.9 33.10 33.11 33.12 33.13 33.14 33.15 33.16 33.17 33.18 33.19 33.20 33.21 33.22 33.23 33.24 33.25 33.26 33.27 33.28 33.29 33.30 33.31 33.32 33.33 33.34 33.35 33.36 33.37 33.38 33.39 33.40 『고려사』.[71] 탐라국왕이 원나라에 입조해 황제를 뵌 적이 있는데, 반적이 군주를 내쫓고 성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탐라국왕이란 탐라 성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F] 72.1 72.2 72.3 72.4 72.5 72.6 『원사』.[G] 78.1 78.2 『명실록』.[81] 고려사 이행 열전에서는 "탐라가 (고려에) 귀순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耽羅歸順始此) 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