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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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Тими миллии футболи Тоҷикистон
정식명칭
Тими миллии футболи Тоҷикистон[1]
[2]تیم ملی تاجیکستان‎
TJK
협회
타지키스탄 축구 연맹 (TFF)
연맹
지역연맹
감독
우스몬 토셰프 (Usmon Toshev)
주장
공석
최다득점자
유수프 라비에프 (Yusuf Rabiev) 15골
홈 구장
파미르 스타디움 (Pamir Stadium)
첫 국제경기 출전
VS 우즈베키스탄 (2:2 무), 타지키스탄 두샨베 (1992년 6월 17일)
최다 점수차 승리
VS 괌 (16:0 승), 이란 타브리즈 (2000년 11월 26일)
최다 점수차 패배
VS 일본 (0:8 패), 일본 오사카 (2011년 10월 11일)
별칭
Тоҷ (왕관), шери порси (페르시안 사자)
유니폼
홈
어웨이
상의
하양
빨강
하의
하양
빨강
양말
하양
빨강

타지키스탄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다루는 항목. 왕관(Тоҷ)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 개요2. 역대전적

1. 개요[편집]

홈구장은 파미르 경기장이며 감독은 공석이다.

1992년 대회는 소련의 일원이었다. 아직 월드컵·아시안컵 본선에 출전한 기록은 없다.

한국과는 1997년 경기를 가진 바 있는데, 이 경기는 신의손이 국가대표로 출전한 유일한 경기였다.[3] 당시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과 맞붙게 된 대한민국에서 우즈벡전을 대비하기 위해 비슷한 스타일의 타지키스탄 대표팀을 초청해서 평가전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대부분의 대표선수들이 러시아 리그에서 뛰고 있던 타지키스탄이 러시아 리그에서 차출 불허를 결정해 파행운영되고 만다. 그래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고작 7명에 그쳐 부랴부랴 타지키스탄계 선수들[4]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국에서 찾아낸 선수들이 천안 일화의 신의손과 전북 현대의 비탈리 파라흐네비치였던 것. 본래 타지키스탄이 고향인 신의손은 그렇다 해도 비탈리의 경우에는 태어난 곳도 우크라이나, 선수생활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한민국에서만 한 선수였는데, 혈통때문에 가지게 된 타지키스탄 이중국적 덕택에 타지키스탄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한민국과의 A매치를 졸지에 소화하게되었다.[5]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이 손쉽게 4-1 승리를 거뒀다.

구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 중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은근히 연령별 대회에서는 성적을 내는 편이다. AFC U-19 챔피언십에서 2016년에는 호주와 중국을 떨어트리고 8강에 올랐던 전적도 있고, 2018년 대회에도 8강에 진출해 대한민국과 의외의 접전을 펼쳐 0-1로 아쉽게 진 적이 있다. 2020년 대회에도 본선에 진출해있다. U-17 연령 대표팀은 더 성과를 내고 있는데 2006년 AFC U-16 챔피언십에서 깜짝 4강에 올라 2007 FIFA U-17 월드컵 대한민국 본선에 진출했고, 여기서도 미국에게 사상 첫 승을 거두고 16강까지 진출해 페루와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아쉽게 떨어진 선전을 펼친 바 있다. 10년 뒤 열린 2018년 AFC U-16 챔피언십에서 다시 한번 4강에 올라 대한민국을 1-0으로 잡는 이변을 연출하며 준우승을 차지해 역사상 두 번째로 U-17 월드컵에 진출했고, 스페인, 아르헨티나에 밀려 16강에는 실패했지만 카메룬을 1-0으로 잡는 성과를 얻었다. 종합하자면 연령별 대회의 성과로 미래가 기대되는 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대전적[편집]

2.1. FIFA 월드컵[편집]

연도
라운드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불참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
?
?
?
?
?
?
?
합계
본선진출 없음
0/21[6]

2.2. AFC 아시안컵[편집]

연도
라운드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독립국가연합으로 유로 대회 참가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불참
예선 탈락
예선 탈락
예선 탈락
합계
본선진출 없음
0/16

[1] 타지크어[2] 페르시아어[3] 선수 명단에 들었던 경기는 총 15번.[4] 당시에는 소련이 붕괴한지 5년이 겨우 넘은 때라 소련인들의 국적 정리가 완벽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이중국적자들이 매우 많았다.[5] 그리고 이게 비탈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A매치 경력이 되었다.[6]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