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성우는 1898년 6월 22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식 이름은 최바실리이다. 그는 1919년 7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을 근거지로 조직된 일세당(一世黨)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하자 이를 피해 러시아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로 이주하였고, 러시아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기관지 <붉은 별[赤星]>의 편집을 담당했다.
러시아 치타에 본부를 둔 극동국 한인부가 1920년 12월 29일 한국인 공산 청년 단체들을 러시아 공산청년회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 것을 결정하고 공산청년회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였다. 이에 최성우는 공산청년회 극동국 한인부 책임 비서가 되었다. 또한 1923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 그는 1929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에 결성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지부 자격을 취소했던 코민테른이 그 재건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잠정적 최고 지도부였다. 조선위원회는 쿠시넨을 비롯하여 6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한국인 성원은 최성우, 박헌영, 박애 등 3명으로, 이들을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는 잡지 <콤무니스트>를 중국 상해에서 발행했는데, 최성우는 김단야, 김정하와 함께 기관지 책임 편집국원이었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최성우를 포함한 트로이카와 잡지 『콤무니스트』를 발간하는 인물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와 노선에 충실히 따른다는 의미에서 국제선이라고 불렸다.
최성우는 1930년 2월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지만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1931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937년 11월 28일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최성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러시아 치타에 본부를 둔 극동국 한인부가 1920년 12월 29일 한국인 공산 청년 단체들을 러시아 공산청년회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 것을 결정하고 공산청년회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였다. 이에 최성우는 공산청년회 극동국 한인부 책임 비서가 되었다. 또한 1923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 그는 1929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에 결성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지부 자격을 취소했던 코민테른이 그 재건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잠정적 최고 지도부였다. 조선위원회는 쿠시넨을 비롯하여 6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한국인 성원은 최성우, 박헌영, 박애 등 3명으로, 이들을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는 잡지 <콤무니스트>를 중국 상해에서 발행했는데, 최성우는 김단야, 김정하와 함께 기관지 책임 편집국원이었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최성우를 포함한 트로이카와 잡지 『콤무니스트』를 발간하는 인물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와 노선에 충실히 따른다는 의미에서 국제선이라고 불렸다.
최성우는 1930년 2월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지만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1931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937년 11월 28일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최성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