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이름 | 조제프 곤살레스[1] (Joseph Gonzales) |
생년월일 | |
사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178cm |
등번호 | -[3] |
소속팀 | JP 베니사프 (1921-1926) ASPTT 우지다 (1926-1931) US 발랑시엔 안장 (1931-1933) SC 피브 (1933-1936)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6-1943) EF 마르세유프로벵스 (1943-194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4-1946) |
국가대표 | 1경기 (1936) |
감독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2-1943) EF 마르세유프로방스 (1943-194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4) SSMC 미라마 (1947-1948) SSMC 미라마 (1949-1950) |
1. 개요[편집]
2. 생애[4][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곤살레스는 프랑스령 알제리였던 베니 사프(Béni Saf)에서 태어났고 1921년부터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배웠다고 한다. 1926년에는 모로코의 우지다(Oujda)로 이주해서 축구를 계속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1931년 프랑스로 간 곤살레스는 US 발랑시엔 안장 소속의 선수가 되었다. 1932년에 프랑스 전국 리그가 출범하면서 발랑시엔 안장은디비지옹 2에 소속되었는데 발랑시엔 안장 옆의 디비지옹 1 클럽인 SC 피브[5]가 곤살레스의 영입 제의를 타진했다. 발랑시엔 안장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곤살레스는 1933년부터 SC 피브의 선수가 되었다.
입단하자마자 곤살레스는 피브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매김했고 팀 실점을 디비지옹 1 참가팀들 중 최저인 31실점으로 줄이면서 1934년 피브의 디비지옹 1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후의 피브는 11위, 8위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고 1936년에 다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한 곤살레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이적 첫 시즌의 대부분을 날리는 바람에 단 10경기만 참가했지만 팀은 디비지옹 1 우승을 차지했다.
1937-38 시즌에 곤살레스는 다시 마르세유의 핵심 수비수 자리를 차지했고 팀은 디비지옹 1 준우승, FC 메스를 결승전에서 2대1로 꺾으며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곤살레스는 마르세유에 남아 비공식 시합들을 치렀다. 1940년, 마르세유는 다시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디펜딩 챔피언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 1대2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1942년, 곤살레스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주장으로 임명된 동시에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감독 데뷔 시즌에 곤살레스는 마르세유를 이끌고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다음 해, 프랑스 선수들의 팀 재배치로 인해 곤살레스는 1년을 마르세유프로방스에서 보냈고 1944년에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하지만 곤살레스는 1945년 1월 선수 겸 감독직에서 물러나 선수로만 뛰게 되었다.
1945년 9월 30일, 마르세유가 FC 루앙에게 0대6으로 학살당한 경기가 곤살레스의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으며 곤살레스는 1945-46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곤살레스는 디비지옹 1에서 통산 150경기에 출전했고 2골을 넣었다.
입단하자마자 곤살레스는 피브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매김했고 팀 실점을 디비지옹 1 참가팀들 중 최저인 31실점으로 줄이면서 1934년 피브의 디비지옹 1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후의 피브는 11위, 8위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고 1936년에 다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한 곤살레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이적 첫 시즌의 대부분을 날리는 바람에 단 10경기만 참가했지만 팀은 디비지옹 1 우승을 차지했다.
1937-38 시즌에 곤살레스는 다시 마르세유의 핵심 수비수 자리를 차지했고 팀은 디비지옹 1 준우승, FC 메스를 결승전에서 2대1로 꺾으며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곤살레스는 마르세유에 남아 비공식 시합들을 치렀다. 1940년, 마르세유는 다시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디펜딩 챔피언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 1대2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1942년, 곤살레스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주장으로 임명된 동시에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감독 데뷔 시즌에 곤살레스는 마르세유를 이끌고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다음 해, 프랑스 선수들의 팀 재배치로 인해 곤살레스는 1년을 마르세유프로방스에서 보냈고 1944년에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하지만 곤살레스는 1945년 1월 선수 겸 감독직에서 물러나 선수로만 뛰게 되었다.
1945년 9월 30일, 마르세유가 FC 루앙에게 0대6으로 학살당한 경기가 곤살레스의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으며 곤살레스는 1945-46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곤살레스는 디비지옹 1에서 통산 150경기에 출전했고 2골을 넣었다.
2.2.2. 국가대표[편집]
2.3. 이후[편집]
3. 수상[편집]
3.1. 클럽[편집]
- 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6-37(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2회: 1937-38, 1942-43(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디비지옹 1 준우승 3회: 1933-34(SC 피브), 1937-38, 1938-39(이상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회: 1939-40(올랭피크 드 마르세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