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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정봉주[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3년 3월 7일과 4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정봉주는 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1923년 1월 31일 평북 위원군 서태면 남파 부근에서 일제 경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정봉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선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정봉주[편집]
성명 | 정봉주(鄭奉周)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정봉주는 1903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천북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3월 평양 숭실대학 문과 수료 후 만주 봉천 등지에서 항일규합에 참가.
1941년경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사료근거요망)
1942년
남경에서 아지트를 틀은 그는 큰 딸 정영(鄭瑛), 아들 정영호(鄭英昊)와 함께 남경중앙대학 재학 중이던 이일범(李一凡), 조일문(趙一文) 주축으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한족동맹회 감찰위원장을 맡게 된다. 10여명의 남경중앙대학 한인학생들과 중국인 대학생[왕해청(王海靑)·소건국(蘇建國)·능담여(凌澹如)·임세원(林世源)]들의 도움으로 일본군내에 있는 한적사병을 구출하여 광복군 제 2지대 총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중국 서안 두곡리로 수차례 이송하는 초모활동을 하게 된다. 그 외 대적선전공작, 일본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수집 등 적후방공작을 전개하는 활동도 하게 된다.
1943년 9~10월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병호(김중민)과 송지영(宋志英)간 접선하게 되고, 밀정 최상교의 밀고로 인하여 송지영(宋志英)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후 남경중앙대학 한인학생들의 검거 선풍이 불게 된다.
그 결과 상해 일본경찰에 의하여 조일문(趙一文), 이일범(李一凡), 이정선(李正善)등이 체포되었고 이정선은 곧 풀려났으나 조일문, 이일범은 6개월 투옥하게 되고 정윤관의 뇌물공작활동으로 인하여 조일문은 일본군 특무대에 근무하게 되고 이일범은 일본군 헌병대와 일본군 특무대에 근무하게 된다.
1944년 2월
자신의 사위이자 동지인 이일범(李一凡)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 광복군 징모처 제 3분처에서 활동하던 유수인(柳樹人)과 접선했고, 그해 12월 이일범(李一凡), 정영호(鄭英昊), 조일문(趙一文), 김호인(金湖人), 정희섭(鄭熙燮) 등과 함께 일본군 진영을 탈영한 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주로 강남지구에서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패전까지 중화민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장관(顧祝同) 소속 독립운동가 유수인(柳樹人)이 이끄는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의 부대장 겸 정치지도원 역임했다.
일본국 패전으로 8.15 광복을 맞이하고
1946년 3월에 귀국하게 된다.
1948년 2월
대한수리조합위원회 총무과장
1954년 5월
사무관으로 진급하여 외자청 업무과장, 회계과장 및 여수상무과장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7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봉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註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5·26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615면
軍, (고정훈) 동방서원, 1967년
나의 길 찾아, 김용 2012년
일본국 패전으로 8.15 광복을 맞이하고
1946년 3월에 귀국하게 된다.
1948년 2월
대한수리조합위원회 총무과장
1954년 5월
사무관으로 진급하여 외자청 업무과장, 회계과장 및 여수상무과장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7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봉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註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5·26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615면
軍, (고정훈) 동방서원, 1967년
나의 길 찾아, 김용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