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전해운(全海運) |
이명 | 전해운(全海雲)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전해운은 1890년 10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4월 1일 경성 소격동에서 동향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파견된 민정식(閔庭植)으로부터 독립공채 액면 100원 3통을 받았다. 이때 민정식은 안성군 서운면 산평리의 민만식(閔晩植)을 찾아가 이를 제시하고 군자금을 받아오라고 권유하였다. 전해운은 다시 소격동의 이영휘(李英輝)에게 이 공채를 교부하고 직접 민만식에게 받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음력 3월 4일경, 이영휘는 민만식의 집으로 찾아가 공채를 교부하고 군자금 100원을 받았다. 이후 음성, 충주, 제천 등지의 자산가에게 독립공채를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향후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동지 6명과 함께 종로의 중국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장소가 제일루(第一樓)였기 때문에, 속칭 ‘제일루사건’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전해운은 1921년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음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3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전해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음력 3월 4일경, 이영휘는 민만식의 집으로 찾아가 공채를 교부하고 군자금 100원을 받았다. 이후 음성, 충주, 제천 등지의 자산가에게 독립공채를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향후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동지 6명과 함께 종로의 중국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장소가 제일루(第一樓)였기 때문에, 속칭 ‘제일루사건’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전해운은 1921년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음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3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전해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