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Wongaksa Pagoda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시설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67년 |
유리 보호각을 씌우기 이전의 모습 |
1. 개요[편집]
2. 내용[편집]
원각사는 원래 고려시대에 창건된 흥복사로,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세조 10년(1464)에 원각사로 고쳐 지은 절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에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이 들어서고 중종 9년(1514)에 절이 헐리면서 없어졌다. 이 탑은 고종 32년(1895)에 총 세무사로 재직하였던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건의로 원각사 터에 공원이 들어서 탑골공원으로 바뀐 이후에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산성비로 인한 손상 방지를 위해 유리 보호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1]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도 한국의 국보가 되었다. 매우 수려하면서도 기교적인 그 면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에 꼽히는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일제시대에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에 왔으면 꼭 봐야 할 명물로 손꼽혔다. 퍼시벌 로웰은 1883~1884년에 걸쳐 몇 개월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원각사지 석탑을 보고 석탑 옆에 있는 민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지붕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2]
조선 후기에는 흰 돌로 지은 탑이라 하여 백탑(白塔)이라고 불렸으며, 박지원이 이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그와 교류한 실학자들을 백탑파라고 일컫는다.
3. 영상[편집]
4. 국보 제2호[편집]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 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 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