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오성무(吳成武) |
일본식 이름 | 山川成武 |
생몰 | |
사망지 | |
위패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성무는 1898년 11월 18일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면 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10월 13일 안동노동공제회(安東勞動共濟會)를 해소하고 조직된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 발회식(發會式)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5일에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위원(常務委員)으로 선출되어 재무부 담당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1일 언론계의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해 안동 인근 7개 군의 한글 신문·잡지 기자들의 연합체로 조직된 안동기우단(安東記友團)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안동지국 기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안동지국 총무 겸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 1926년 3월경 안동 풍산소작인회의 예천군 하리면 은풍출장소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4월 19일 ‘소요 및 업무방해’ 등의 죄목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7월 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같은 달 하성향(河成鄕)의 집에서 김남수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7년 봄 무렵부터 이회승을 책임자로 한 야체이까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5월 15일 열린 신흥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0월경 신간회 안동지회회관(安東支會會館)에서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김경한(金慶漢)을 책임자로 한 야체이까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6~8일 김천청년동맹회관(金泉靑年同盟會館)에서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慶北靑年運動者懇談會)가 개최되었다. 8일에는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 창립대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 경북청년연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월 17일 열린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銓衡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28~29년 당시 신간회 안동지회 대표위원, 간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25일경 안동경찰서(安東警察署)에 체포되었다. 안동을 비롯해 예천·영주(榮州)·상주(尙州) 등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조선공산당 관계자가 대거 검거되었다. 11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1934년 칙령 제 19호로 인해 징역 6개월로 감형되었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그는 1931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토건(土建) 부문, 센슈일반노동조합(泉州一般勞動組合)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2월 1일 원장 김상구(金相求)를 중심으로 설립된 사숙(私塾) 간사이공명학원(關西共鳴學院)에서 김재수(金在秀) 등과 함께 담임교사로 근무하였다. 한국인 미취학 아동에 대한 보조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간사이공명학원에서 약 150명의 한국인 아동을 교육하고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오사카 지역의 한국인 야학(夜學)을 조직적으로 통일하는 활동도 병행하였다.
1937년 2월 19일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4월 12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38년 7월 1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천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 9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925년 11월 1일 언론계의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해 안동 인근 7개 군의 한글 신문·잡지 기자들의 연합체로 조직된 안동기우단(安東記友團)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안동지국 기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안동지국 총무 겸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 1926년 3월경 안동 풍산소작인회의 예천군 하리면 은풍출장소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4월 19일 ‘소요 및 업무방해’ 등의 죄목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7월 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같은 달 하성향(河成鄕)의 집에서 김남수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7년 봄 무렵부터 이회승을 책임자로 한 야체이까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5월 15일 열린 신흥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0월경 신간회 안동지회회관(安東支會會館)에서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김경한(金慶漢)을 책임자로 한 야체이까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6~8일 김천청년동맹회관(金泉靑年同盟會館)에서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慶北靑年運動者懇談會)가 개최되었다. 8일에는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 창립대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 경북청년연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월 17일 열린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銓衡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28~29년 당시 신간회 안동지회 대표위원, 간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25일경 안동경찰서(安東警察署)에 체포되었다. 안동을 비롯해 예천·영주(榮州)·상주(尙州) 등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조선공산당 관계자가 대거 검거되었다. 11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1934년 칙령 제 19호로 인해 징역 6개월로 감형되었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그는 1931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토건(土建) 부문, 센슈일반노동조합(泉州一般勞動組合)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2월 1일 원장 김상구(金相求)를 중심으로 설립된 사숙(私塾) 간사이공명학원(關西共鳴學院)에서 김재수(金在秀) 등과 함께 담임교사로 근무하였다. 한국인 미취학 아동에 대한 보조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간사이공명학원에서 약 150명의 한국인 아동을 교육하고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오사카 지역의 한국인 야학(夜學)을 조직적으로 통일하는 활동도 병행하였다.
1937년 2월 19일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4월 12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38년 7월 1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천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 9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