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리오 포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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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감독 | ||
이름 | 비토리오 포초 Vittorio Pozzo | |
본명 | 비토리오 주세페 루이지 포초 Vittorio Giuseppe Luigi Pozzo |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신체 | ||
직업 | ||
소속 | 선수 | |
감독 | ||
국가대표 | 없음 | |
수피시(1930) ◀ | ★(1934) | ▶ 포초(1938) | ||
포초(1934) ◀ | ★(1938) | ▶ 로페스(1950) | ||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29년부터 1948년까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면서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을 잇따라 우승, 조국 이탈리아에 두 번이나 월드컵을 안겨준 영웅이자 명장이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면서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을 잇따라 우승, 조국 이탈리아에 두 번이나 월드컵을 안겨준 영웅이자 명장이었다.
2. 생애[3]
2.1. 어린 시절
2.2. 선수 경력
2.3. 감독 경력
2.3.1. 초기 감독 생활
선수 생활을 마친 포초는 기술위원회 체제 이후 최초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데뷔 무대는 1912년 올림픽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1라운드에서 핀란드에 연장 혈투 끝에 3대2로 패배하였고, 곧 사임하였다. 포초는 학업을 마치고 피렐리에서 일하는 동시에 토리노 FC의 감독 겸 기술 디렉터로 활동하였다. 이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도 있었는데 당시 포초는 알피니라 불리는 산악 전투병과에서 중위 계급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24년 올림픽에서 포초는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스위스에 8강에서 2대1로 패하고 말았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병으로 잃고 말았고, 밀라노로 옮겨 AC 밀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라 스탐파의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는데 저널리스트 활동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1924년 올림픽에서 포초는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스위스에 8강에서 2대1로 패하고 말았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병으로 잃고 말았고, 밀라노로 옮겨 AC 밀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라 스탐파의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는데 저널리스트 활동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2.3.2. 30년대의 성공
1929년에 다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 된 포초의 첫 시합 상대는 포르투갈. 밀라노에서 열린 이 시합에서 이탈리아는 포르투갈을 6대1로 뭉개버렸고, 이 기세를 이어 1930년까지 개최된 중유럽 컵에서 우승하면서 감독으로서 첫 성공을 맛보았다. 대표팀에 오래 재직하다보면 여느 대표팀 감독이 그렇듯 아돌포 발론체리 같은 주축 선수들이 은퇴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포초는 흔들리지 않고 스키아비오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하였고, 그러면서 아르헨티나 출신 오리운디들인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엔리케 구아이타 같은 선수들도 설득시켜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하였다. 그 와중에 토리노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하는 등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4] 꾸준히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수혈된 이탈리아 대표팀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초대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는 여느 유럽팀들과 마찬가지로 불참했는데, 그 동안 포초는 전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포초는 당시까지 대세였던 단순한 평면 2-3-5에서 센터 하프를 앞으로 좀 더 빼고 인사이드 포워드를 내려서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었고, 중원 싸움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분더팀의 감독 후고 마이슬 역시 비슷하게 센터 포워드 마티아스 신델라를 내려 폴스 나인 전술을 사용하였고, 물 건너 아스날 FC에서 W-M 포메이션을 만들어 아스날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 허버트 채프먼과 함께 30년대 축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이 메토도 전술의 핵심은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 인사이드 포워드 듀오 주세페 메아차, 조반니 페라리의 존재였다.
1938년 월드컵을 준비하던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5년 10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무패 행진을 달리면서 순항중이었다. 스키아비오, 오르시, 구아이타, 콤비, 칼리가리스, 로세타 등 많은 선수들이 1934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지만 실비오 피올라, 지노 콜라우시, 알도 올리비에리, 피에트로 라바 같은 새로운 얼굴도 들어왔고, 이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월드컵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펠레, 가린샤, 지지,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 등이 활약한 최전성기의 브라질만이 같이 가지고 있다.
초대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는 여느 유럽팀들과 마찬가지로 불참했는데, 그 동안 포초는 전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포초는 당시까지 대세였던 단순한 평면 2-3-5에서 센터 하프를 앞으로 좀 더 빼고 인사이드 포워드를 내려서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었고, 중원 싸움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분더팀의 감독 후고 마이슬 역시 비슷하게 센터 포워드 마티아스 신델라를 내려 폴스 나인 전술을 사용하였고, 물 건너 아스날 FC에서 W-M 포메이션을 만들어 아스날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 허버트 채프먼과 함께 30년대 축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이 메토도 전술의 핵심은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 인사이드 포워드 듀오 주세페 메아차, 조반니 페라리의 존재였다.
1938년 월드컵을 준비하던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5년 10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무패 행진을 달리면서 순항중이었다. 스키아비오, 오르시, 구아이타, 콤비, 칼리가리스, 로세타 등 많은 선수들이 1934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지만 실비오 피올라, 지노 콜라우시, 알도 올리비에리, 피에트로 라바 같은 새로운 얼굴도 들어왔고, 이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월드컵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펠레, 가린샤, 지지,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 등이 활약한 최전성기의 브라질만이 같이 가지고 있다.
2.4. 그 이후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이후,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지만 포초는 감독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포초의 감독 생활 마지막 경기는 1948년 올림픽으로 런던의 하이버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8강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덴마크에 5대3으로 패하면서 우승컵 사냥에는 실패했지만, 통산 97경기에서 65승 17무 15패. 승률 67%를 기록했다.[5] 특히 1935년 10월부터 1939년 11월까지의 4년간 26경기 무패 행진의 기록을 세운 것이 백미. 포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수페르가의 비극 당시의 추모식이었다.
감독 생활을 정리한 포초는 그 이후 라스탐파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5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를 분석하기도 했다. 1968년 자국에서 열린 유로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지켜본 포초는 그 해 12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감독 생활을 정리한 포초는 그 이후 라스탐파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5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를 분석하기도 했다. 1968년 자국에서 열린 유로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지켜본 포초는 그 해 12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3. 평가
4. 일화
- 포초는 1938년 월드컵 당시 4강전을 앞두고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썼다. 포초가 이끌던 이탈리아 대표팀은 당시 파리에서 8강전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4강전이 열릴 마르세유에서 브라질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4강전 경기 다음날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가는 단 한대의 비행기가 전석 매진이 된 것. 그 이유를 알아보니 브라질 축구팬들이 결승전을 대비해서 표를 잔뜩 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코트 디아술에서 일광욕을 하는 브라질 사람들을 만나 이탈리아가 올라갈 수도 있으니 비행기 티켓을 일부 팔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기고 당연히 파리로 갈텐데 왜 비행기 티켓을 넘겨달라 하느냐'는 식으로 거만하게 대답을 했고, 포초는 이를 선수들에게 그대로 말하여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하였다. 결국 이탈리아가 브라질에 2대1로 승리하였지만 브라질 축구팬들은 항공권을 팔지 않았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기차를 이용해 파리로 올라가야만 했다.
5. 수상
5.1. 감독
- 중부 유럽 컵 우승 2회: 1927–30, 1933–35
- 프리마 카테고리아 북부 리그 준우승 1회: 1914-15(토리노 FC)
5.2. 개인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년 헌액
- 월드사커 매거진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11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