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전에서도 모노클을 즐겨 착용했다. |
이름 | |
출생 | |
사망 | |
복무 | |
최종 계급 | |
주요 참전 | |
주요 서훈 | 기사 철십자 훈장 |
▲ 1941년의 사진. |
▲ 컬러 사진. |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2.2. 바이마르 공화국[편집]
2.3.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편집]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라이헤나우는 국방부 군무국장에 임명되어 나치당과 국방군 사이를 잇는 연락장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던 나치당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에 대한 국방군 수뇌부의 비토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등에게 전해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룀의 숙청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중화민국과의 친선을 강하게 주장하여 중국-독일 간 군사 지원 및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진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일전쟁 초반기까지 진행된 중국과 독일 간의 군사 및 경제 협력은 중국의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 역량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동시에 독일도 외화의 낭비가 없이 군수 생산 및 민간 경제에 필요한 희귀 물자를 조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소장, 1935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5] 이후 히틀러는 나치빠였던 라이헤나우를 국방장관이나 육군총사령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둘 중 한 곳에 오르면 국방군이 모두 나치의 하부 조직이 될 것을 우려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6]
많은 국방군의 고위 장교들이 나치를 혐오했으나, 라이헤나우는 고위 장교들이 혐오하던 하인리히 힘러에게 국방군 내의 쿠데타 움직임을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1934년 소장, 1935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5] 이후 히틀러는 나치빠였던 라이헤나우를 국방장관이나 육군총사령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둘 중 한 곳에 오르면 국방군이 모두 나치의 하부 조직이 될 것을 우려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6]
많은 국방군의 고위 장교들이 나치를 혐오했으나, 라이헤나우는 고위 장교들이 혐오하던 하인리히 힘러에게 국방군 내의 쿠데타 움직임을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2.4. 폴란드-프랑스 전역[편집]
2.5. 독소전쟁[편집]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라이헤나우는 다시 6군을 거느리고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다시 소련을 침공하였다. 라이헤나우가 거느린 6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하르코프까지 다다른다.
라이헤나우는 다른 고위 지휘관들은 무시하거나 아랫사람에게 책임으로 미루던 히틀러의 전쟁범죄적인 명령을 오히려 자기의 이름으로 더욱 강조해서 내리기도 했으며, 1941년 10월 10일 이를 문서화하였다. 이를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이라고 한다. 아래는 그 일부.
라이헤나우는 다른 고위 지휘관들은 무시하거나 아랫사람에게 책임으로 미루던 히틀러의 전쟁범죄적인 명령을 오히려 자기의 이름으로 더욱 강조해서 내리기도 했으며, 1941년 10월 10일 이를 문서화하였다. 이를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이라고 한다. 아래는 그 일부.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The most important objective of this campaign against the Jewish-Bolshevik system is the complete destruction of its sources of power and the extermination of the Asiatic influence in European civilization. ... In this eastern theatre, the soldier is not only a man fighting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f the art of war, but also the ruthless standard bearer of a national conception. ... For this reason the soldier must learn fully to appreciate the necessity for the severe but just retribution that must be meted out to the subhuman species of Jewry.)
Das wichtigste Ziel des Feldzugs, woher Deutschland gegen Jud-Kommunistismus kämpft ist Vernichtung, die mit Jud, Kommunistismus, und Asienen Kultur abhängig ist. Am Osten Front ist ein Soldaten nicht nur Leute, wer den traditionellen Operationen folgen, sondern dass Repräsentant des National-Sozialistismus' harsch. So sollen Wir verstehen den geraden Schiedsrichtern für Jud, Wen minderwertiges Volk ist.
즉 동부 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적인 전쟁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시키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관할하던 영역에서는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학살 부대들이 다른 곳보다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는 이 명령문을 자신의 부대뿐만 아니라 남부집단군을 포함한 동부전선 모든 부대에 회람시켰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는 그것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자신의 휘하였던 제6군의 사령관인 라이헤나우의 싸이코 같은 언동을 막지는 못할지언정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
이 명령을 당시 남부집단군 일선부대의 고급 장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병사들이 친위대와 학살에 나서면서 진격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지휘관 파울루스는 아예 대놓고 명령을 씹고 불태워 버렸을정도.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전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을 해임하기 시작했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른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후임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라이헤나우를 앉히려고 했으나 라이헤나우의 지나친 친나치 성향을 알고 있는 참모본부의 반발에 직면했고,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라이헤나우를 남부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전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을 해임하기 시작했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른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후임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라이헤나우를 앉히려고 했으나 라이헤나우의 지나친 친나치 성향을 알고 있는 참모본부의 반발에 직면했고,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라이헤나우를 남부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2.6. 최후[편집]
3. 평가[편집]
친나치 군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도 라이헤나우의 군사적 재능은 인정받고 있다. 그가 지휘하던 6군이 프랑스 침공 때 벨기에군을 차단한 것은 프랑스 침공전의 대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사람이 너무 일찍 사라져서 부대 지휘 경험이 전간기에 연대장을 잠시 맡은것 외엔 전혀 없는 참모장교 출신 파울루스가 제6군을 지휘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극을 빚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9] 라이헤나우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파울루스는 참모장교 출신답게 결단에 서툴렀고, 결정적일 때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위치를 사수하다가 결국 독일군의 대패를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친나치 군인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개전 이전에도 독일군 내부에서 평판이 안 좋았고[10], 그 때문에 육군 총사령관 자리도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야전 지휘관들보다 총통 사령부에 근무하던 장성들만이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사형이 언도되었어도 집행까지는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러 모로 국방군이 아니라 물론 한 행위를 보면 사형을 때려도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 이 사람이 너무 일찍 사라져서 부대 지휘 경험이 전간기에 연대장을 잠시 맡은것 외엔 전혀 없는 참모장교 출신 파울루스가 제6군을 지휘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극을 빚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9] 라이헤나우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파울루스는 참모장교 출신답게 결단에 서툴렀고, 결정적일 때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위치를 사수하다가 결국 독일군의 대패를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친나치 군인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개전 이전에도 독일군 내부에서 평판이 안 좋았고[10], 그 때문에 육군 총사령관 자리도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야전 지휘관들보다 총통 사령부에 근무하던 장성들만이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사형이 언도되었어도 집행까지는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러 모로 국방군이 아니라 물론 한 행위를 보면 사형을 때려도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4. 일화[편집]
5. 주요 보직 내역[편집]
- 1935.10.01 : 뮌헨 주둔 7군단장
- 1938.02 ~ 1939.09.01 : 라이프치히 주둔 4집단 사령관
- 1939.09.01 ~ 1939.10.19 : 10군 사령관
- 1939.10.20 ~ 1941.11.30 : 6군 사령관
- 1941.12.01 ~ 1942.01.17 :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6. 진급 내역[편집]
- 1912.08.18 : 중위(Oberleutnant)
- 1914.11.28 : 대위(Hauptmann)
- 1923.07.01 : 소령(Major)
- 1929.04.01 : 중령(Oberstleutnant)
- 1932.02.01 : 대령(Oberst)
- 1934.02.01 : 소장(Generalmajor)
- 1935.10.01 : 중장(Generalleutnant)
- 1936.10.0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39.10.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07.19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편집]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0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30 : 기사 철십자 훈장
[1] 모노클은 프로이센 귀족의 전통 중 하나이다. 야전에서는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훈장 수여식과 관련 기념 촬영에 참석할 때엔 착용한다.[2] 영어권 다큐멘터리에서는 "라이헤노"로 읽기도 한다.[3]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라이헤나우'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4] 육군총사령관이나 육군참모총장 모두 거뜬히 할 수 있었다는 게 군사사 연구자들의 평이다.[5] 하인리히 힘러의 계략에 의해 국방장관이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후처가 창녀 출신이었음이 밝혀졌고,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베르너 폰 프리치가 동성애자라는 설이 돌아서 두 명 다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6] 1930년대까지는 친나치 성향보다도 너무 젊은 연령이라는 게 참모총장이나 총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하지 못하는 원인이었다.[7] 취임 직전에는 참모차장이었다. 파울루스의 사령관 취임은 라이헤나우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야전군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8] 어떤 책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진격 명령을 거부하여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나 이는 냉전 당시 군사 문서가 별로 공개되지 않았을 때의 가설 제기에 불과하다. 실제로 영미권 전사학자들의 6,70년대 유명 전사학 서적들은 지금 보면 팩트가 아닌 픽션이 상당히 많다. 출처도 근거도 없는 내용이 대부분. 문제는 네티즌들이 이러한 서적들만을 출처로 영문 위키에도 버젓이 올려 놓는다는 점.[9] 물론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히틀러의 탓이 가장 크다.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을 것임이 전선 각지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나 이러한 조짐은 히틀러의 고집에 모두 씹혔다. 다만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있던 라이헤나우가 살아있었다면 설득이 가능했을지도.[10] 근데 실제로 레프 앞에서 부하가 이런 식으로 말하자 "뭐? 놀고 있네. 그러다 파울한테 싸대기만 주구장창 맞겠지.".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그 악명 높은 슈츠슈타펠마저 라이헤나우를 이렇게 볼 정도면 내부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았던 인물인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