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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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영출(朴英出)
자/호
현출(炫出)/정인(盯仁)
생몰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사망지
대구형무소
매장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연화봉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편집]

한국의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로 일본공산당,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영출은 1908년 3월 20일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부친 박인표(朴仁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지주였으며, 1910년대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 등을 조직했고 고려상회 동래은행 및 명정의숙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박영출은 1920년 3월 기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에 재학하면서 기장학우회 회장을 역임해 학생들의 단결과 항일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1920년 11월 17일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동래로 이주했다. 1925년 7월 새로 부임해 온 일본인 교장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는 교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식민지 교육에 순종할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했다. 여기에 한문 담당 교사 이희보가 학생 3명을 부당하게 퇴학시켰다. 이에 분노한 박영출은 1925년 7월 6일 학생 400여 명을 규합하여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이에 경찰이 동맹 휴학을 수사하였고, 학교 측은 박영출을 비롯한 학생 234명을 정학시켰다. 나중에 학부형들의 중재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나 학교 측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졌다.

1926년 2월 기숙사 사감인 마쓰다가 조선인 학생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박영출은 졸업을 한 달 남겨둔 상태에서 장산에서의 촛불 시위를 주도했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1927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해 1930년까지 생물학을 공부했으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1930년 교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다 잠시 귀국한 그는 1931년 3월 5일 동래구 수안동 광장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는 발언을 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9월 7일에는 동래청년동맹에서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청년과 종교’라는 주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3년 2월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한 혐의로 구속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4년 교토제국대학을 마치고, 이후 일본공산당 당원이 되어 쿄토대학 내의 조선인그룹 조직책임자로 활동했다. 1934년 귀국후 외숙부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인맥을 동원해 조선광복청년회를 조직했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졸업한 울산 출신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운동을 주도한 이재유를 만났다. 박영출은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5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을 꾀하고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36년 7월 30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8년 8월 2일에 옥사했다.

3. 기타[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연화봉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