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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병장, 박영관[편집]
2. 고창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관[편집]
성명 | 박영관(朴永寬) |
호 | 송와(松窩)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영관은 1899년 7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이리 동척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의 지휘로 추진되었다.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받들어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장성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5년 10월 19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강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관[편집]
박영관은 1883년 12월 21일 평안도 평양부 누차면 삼리(현 평안남도 천리마군 고창리)에서 아버지 박정현(朴鼎鉉)과 어머니 김성진(金聖鎭)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강서군 성태면 성삼리(현 대동군 성삼리)로 이주하여 한학을 공부했고, 1908년 평양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신민회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참여하였다. 1915년에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도학리(현 남포특별시 항구구역 도지리)로 이주하고 장로회에 입교해 장로가 되었다.
1917년 차이나호를 타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맨티카에 정착하여 1918년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대한인국민회가 독립 의연금 모금과 인구 조사를 위해 중앙총회 파출소를 설치했을 때, 그는 맨티카 튜레시의 파출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1월 10일 흥사단에 입단하였고, 구미위원부 재무관 슈피리어 지방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태프트 지방으로 이주하여 과일 채소 상점을 운영하면서 1926년에 대한인국민회 태프트지방회의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영관은 1917년부터 1943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박영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