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태조의 조상 虎景
1.1. 개요
1.2. 고려사 기록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설화에 따르면 호경의 고향은 알려진 바가 없고,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11]을 자처했으며 백두산에서 내려와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12] 좌곡(左谷)에 자리잡아 가정을 꾸렸다. 매우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었다.[13]
활을 잘 쏴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10명이서 평나산으로 사냥을 갔을 때 굴 속에 들어 갔는데 왠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주인을 밖으로 내보내 맟서 싸우도록 정한 뒤 관을 던지니 호경의 것을 물었다. 호경이 결국 굴 밖으로 나가니 범은 온데간데 없고 굴은 무너져 다른 아홉 명은 죽고 말았다.
이후 평나산에서 내려와 평나군(平那郡)에서 그들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갑자기 여신이 등장해 난 과부인데 널 대왕으로 봉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것을 수락, 산군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홉 명이 죽었으니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바꿨다. 또한 호경사를 지어 호경을 기렸다.[14]
이후 여신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본처가 그리워 밤마다 본처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다 인간 시절에 생기지 않던 아이가 생겨 아이 이름을 강충(康忠)이라 했다.
활을 잘 쏴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10명이서 평나산으로 사냥을 갔을 때 굴 속에 들어 갔는데 왠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주인을 밖으로 내보내 맟서 싸우도록 정한 뒤 관을 던지니 호경의 것을 물었다. 호경이 결국 굴 밖으로 나가니 범은 온데간데 없고 굴은 무너져 다른 아홉 명은 죽고 말았다.
이후 평나산에서 내려와 평나군(平那郡)에서 그들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갑자기 여신이 등장해 난 과부인데 널 대왕으로 봉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것을 수락, 산군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홉 명이 죽었으니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바꿨다. 또한 호경사를 지어 호경을 기렸다.[14]
이후 여신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본처가 그리워 밤마다 본처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다 인간 시절에 생기지 않던 아이가 생겨 아이 이름을 강충(康忠)이라 했다.
1.3. 고구려 유민?
1.4. 태조 왕건과의 관계
2. 춘추시대 이전 주나라의 수도 鎬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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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왕 대의 수도인 풍경에서 무왕(주)대에 천도한 수도. 풍경과 아울러 풍호(豊鎬)로도 불리워졌다. 주나라 유왕 11년(BC770)에 견융족에 함락당할 때까지 주나라의 수도였다. 일명 종주(宗周), 서도(西都). 현재 산시성 시안 서남쪽에 성터 유적이 남아 있다.
호경(종주)를 지키는 군대로 육사(六師)가 있었다. 육사(六師)는 육군(六軍)과 같은 말로 군대 편제를 의미한다. 1군은 1만 2500명으로 고대 중국은 천자국은 6군을, 제후국은 3군의 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은 고려시대 때 6군을 설치 했다가 독자적으로 5군으로 바꾼다.
고려 목종이 서경의 이름을 호경(鎬京)으로 바꾸었다. 이는 고구려 옛 수도 평양이 고려 수도 개경과 동등하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당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목종이 서경을 선호한 것도 있다. 이후 호경은 다시 서경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광종이 바꿨던 서도(西都)와 같이 대표적인 서경의 별칭이 돤다. 인종 시기의 대화궁 치어에서도 서경이 호경(鎬京)으로 나온다.
주문왕 대의 수도인 풍경에서 무왕(주)대에 천도한 수도. 풍경과 아울러 풍호(豊鎬)로도 불리워졌다. 주나라 유왕 11년(BC770)에 견융족에 함락당할 때까지 주나라의 수도였다. 일명 종주(宗周), 서도(西都). 현재 산시성 시안 서남쪽에 성터 유적이 남아 있다.
호경(종주)를 지키는 군대로 육사(六師)가 있었다. 육사(六師)는 육군(六軍)과 같은 말로 군대 편제를 의미한다. 1군은 1만 2500명으로 고대 중국은 천자국은 6군을, 제후국은 3군의 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은 고려시대 때 6군을 설치 했다가 독자적으로 5군으로 바꾼다.
고려 목종이 서경의 이름을 호경(鎬京)으로 바꾸었다. 이는 고구려 옛 수도 평양이 고려 수도 개경과 동등하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당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목종이 서경을 선호한 것도 있다. 이후 호경은 다시 서경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광종이 바꿨던 서도(西都)와 같이 대표적인 서경의 별칭이 돤다. 인종 시기의 대화궁 치어에서도 서경이 호경(鎬京)으로 나온다.
[1] 이승휴의 제왕운기 기록.[2] 구룡산은 이전엔 평나산(平那山), 변한산(卞韓山)이라 불렀고 호경 이후 구룡산(九龍山), 현재는 성거산(聖居山)으로 불린다.[3] 이승휴의 제왕운기 기록.[4] 구룡산은 이전엔 평나산(平那山), 변한산(卞韓山)이라 불렀고 호경 이후 구룡산(九龍山), 현재는 성거산(聖居山)으로 불린다.[5] 고려사엔 성이 나오지 않는다.[6] 고려사엔 성이 나오지 않는다.[7] 이름 미상, 인간 시절의 아내이자 강충의 친모.[8] 여신이다.[9] 이름 미상, 인간 시절의 아내이자 강충의 친모.[10] 여신이다.[11] 신라 골품제의 성골의 영향을 받은 호칭일 가능성이 높다.[12] 개성특급시의 옛 이름.[13] 특이하게도 편년통록엔 호경 일가가 부자였단 서술이 매 인물마다 나온다. 후손 왕륭, 왕건 또한 송악 일대의 거물이었던 것을 보면 설화가 거짓이더라도 호경 일가가 부자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14] 이 호경사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찾아와 참배할 정도로 인지도를 지녔다 한다.[15] 이 때문에 고구려 시절에도 그리 잘난 집안 후손이 아니었거나 고구려 멸망 이후 몰락한 후손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