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서경 분사 장관
고려국 중서문하성 차관 최윤의 | |
시호
| 문숙공(文肅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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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낙랑군 개국후(樂浪郡 開國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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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해주 최씨(海州 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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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천우(天祐) → 윤의(允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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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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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개경 개성부 사저(私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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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 송림현(松林縣) 응석사(凝石寺) 북쪽 언덕(北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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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 1102년 ~ 1162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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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대기
고려사 최윤의 열전은 지극히 짧다. 최윤의의 부모도 알 수 없고 그의 인생, 시호도 나오지 않는다. 윤의의 묘지명이 다행히 남아있어 그의 삶을 조금 알 수 있는데, 최윤의는 최충의 아들 최유선의 아들 최사제의 아들 최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강릉군대부인(江陵郡大夫人) 김씨(金氏)로 배향공신 김상기(고려)의 딸이다. 광양군부인(光陽郡夫人) 김씨(金氏)와 결혼해 아들 2명 딸 3명이 있었다.
최윤의는 명문가 자제답게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후 과거 시험에서 3등으로 합격해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고,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어 서경 분사 조정의 장관이 되었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중서문하성 1등급 차관이 되었다.
의종의 명령으로 최윤의는 고려의 모든 제도를 기록하고 정리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를 제작했다. 총 50권으로 당시 고려의 장례, 군대 사열, 국왕의 의장대, 국새 등 모든 예의범례가 적혀있었다. 이 책은 고종 대 최이가 다시 재출판하여 고려 각지에 놔두었지만 결국 실전되었다. 고려사 예지에 조금씩 인용되어있다.
당시 해주 최씨는 인천 이씨의 기세가 내려가자 단독 1위의 최고 가문이었다. 한 때 인천 이씨의 대표 이자연이 '국척원신(國戚元臣)'으로 불렸다면 최윤의는 '사직원신(社稷元臣)'으로 불렸다. 최윤의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사후:
최윤의는 명문가 자제답게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후 과거 시험에서 3등으로 합격해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고,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어 서경 분사 조정의 장관이 되었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중서문하성 1등급 차관이 되었다.
의종의 명령으로 최윤의는 고려의 모든 제도를 기록하고 정리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를 제작했다. 총 50권으로 당시 고려의 장례, 군대 사열, 국왕의 의장대, 국새 등 모든 예의범례가 적혀있었다. 이 책은 고종 대 최이가 다시 재출판하여 고려 각지에 놔두었지만 결국 실전되었다. 고려사 예지에 조금씩 인용되어있다.
당시 해주 최씨는 인천 이씨의 기세가 내려가자 단독 1위의 최고 가문이었다. 한 때 인천 이씨의 대표 이자연이 '국척원신(國戚元臣)'으로 불렸다면 최윤의는 '사직원신(社稷元臣)'으로 불렸다. 최윤의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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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직: 수태사(守太師)
- 훈위: 상주국(上柱國)
- 작위: 낙랑군 개국후(樂浪郡 開國侯)
- 시호: 문숙공(文肅公)
관작을 받고 제후의 예로 대우되어 윤의의 죽음은 훙(薨)으로, 윤의의 삶은 기린봉황(麒麟鳳凰)으로 표현되었다.
자매론 숙비(淑妃) 최씨가 있었다. 예종 문효왕의 궁주였으며 당시 존호는 장신궁주(長信宮主). 인종이 숙비 귀비호를 올렸다.
아내인 광양군부인 김씨[7]의 묘지명이 실전하고, 최윤의 본인이 직접 쓴 것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아내가 21살, 본인이 29살 때 1131년 3월 13일에 결혼했다고 한다. 부부간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1151년 2월 1일에 광양군부인이 죽었다고 한다. 최윤의는 묘지명에서 눈물이 앞을 가려 붓을 들 수 없었다고 하며 유학자 가문인데도 불교의 말을 빌려 극락천당(極樂天堂)에 가길 바란다며 빌었다.
자매론 숙비(淑妃) 최씨가 있었다. 예종 문효왕의 궁주였으며 당시 존호는 장신궁주(長信宮主). 인종이 숙비 귀비호를 올렸다.
아내인 광양군부인 김씨[7]의 묘지명이 실전하고, 최윤의 본인이 직접 쓴 것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아내가 21살, 본인이 29살 때 1131년 3월 13일에 결혼했다고 한다. 부부간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1151년 2월 1일에 광양군부인이 죽었다고 한다. 최윤의는 묘지명에서 눈물이 앞을 가려 붓을 들 수 없었다고 하며 유학자 가문인데도 불교의 말을 빌려 극락천당(極樂天堂)에 가길 바란다며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