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衛)나라 11대 국군
무공 武公 | |||
희(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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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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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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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위희후(衛僖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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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852년 ~ 기원전 7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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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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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후작 자리를 계승 중입니다. 형님
위무공은 원래 위희후가 살아있을 당시에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무사들을 육성해 희후의 묘지에서 위 공백을 습격하니 위 공백은 세력이 모자라 더 저항할 수 없어 자결한다. 그 자리는 희화가 이었다. 그가 바로 위 무공이다.
2.2. 정사를 바로잡다
2.3. 주평왕을 도와 동천하다
위무공 42년(기원전 771년), 견융족(犬戎族)이 신후(申侯)[2] 녕(寧)의 사주를 받아 서주의 수도인 호경을 쳐서 주유왕과 정환공을 죽였다. 이에 위무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 이때 같이 도우러 온 사람이 정환공의 아들 정무공과 진문후, 진양공(秦襄公)이었다. 그리고 주유왕의 아들인 주평왕 도와 낙읍으로 동천하는 것을 도와 동주가 시작되게 한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위 무공의 공로에 사례했다.[3]
위무공 55년(기원전 758년), 위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희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장공이다.
위무공 55년(기원전 758년), 위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희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장공이다.
[1] 그리하여, 열국지에서 초기 위나라가 정나라나 송나라 등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2] 신나라의 후작.[3] 사기에서는 위 무공을 공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그 뒤에 군주가 위후로 불리는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애초에 공로자만 공작으로 삼고, 그 후손을 공작으로 세습하지 못하게 할 리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