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1257년,1284년,1287년 3차례 베트남을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런 비슷한 사례가 일본에도 있으나 일본은 연합군 형식으로 침공한데다 2번 모두 태풍으로 물러났지만, 베트남은 1차를 제외하고[1]는 쩐흥다오과 그의 수하에 있는 베트남군의 실력이 승리를 견인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남송도 3번에 걸쳐 일어난 몽골의 공습에 40년동안 버텼기에, 이는 베트남과 비슷하나, 남송인 경우는 중요 거점지역인 양양, 번성, 강주, 사천이 모두 점령당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베트남은 세 번에 걸친 전쟁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베트남 원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그 동안 몽골이 다른 대외 원정과 달리 수에서 상대보다 우위인 전력을 내세운건데 몽골은 남송과 대리국 정벌 와중에 찔러보기 형식이었던 1차를 제외하고 2차, 3차에서 50만,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세 차례나 쳐들어갔는데도 실패했다는 점이다.[2][3]
또한 남송도 3번에 걸쳐 일어난 몽골의 공습에 40년동안 버텼기에, 이는 베트남과 비슷하나, 남송인 경우는 중요 거점지역인 양양, 번성, 강주, 사천이 모두 점령당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베트남은 세 번에 걸친 전쟁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베트남 원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그 동안 몽골이 다른 대외 원정과 달리 수에서 상대보다 우위인 전력을 내세운건데 몽골은 남송과 대리국 정벌 와중에 찔러보기 형식이었던 1차를 제외하고 2차, 3차에서 50만,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세 차례나 쳐들어갔는데도 실패했다는 점이다.[2][3]
2. 1차 원정
3. 2차 원정
4. 3차 원정
이번에도 수도 탕롱을 점령했지만, 쩐흥다오가 원나라 수송 선단을 바익당 강에서 전멸시키는 바람에 후퇴했다. 베트남군이 바다 속에 목책을 쌓아두고, 썰물 때 원나라군이 여기에 배가 걸려서 베트남군에 대패했다고 한다.[6] 베트남 정부는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역사관광단지로 조성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여행후기를 볼 수 있다.
5. 관련 문서
[1] 질병 때문에 후퇴했다는 1차 원정마저도 게릴라전이 한 건 했다.[2] 그 전까지 몽골은 상대보다 더 적은 수로 싸웠으면 싸웠지 상대보다 많은 수로 대외 원정을 시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수십만 대군을 두 차례나 동원했던 것도 이때가 유일하다.[3] 사실 이때부터 몽골 군은 주로 한족 등 점령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혼성군으로 이루어지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애초에 몽골인들의 수가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점령지에서 징집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4] 현재의 하노이[5] 쩐흥다오는 이때 그 유명한 격장사를 지어서 수많은 장정들을 징집해서 25만의 대군을 모았다.[6] 이때 원나라 군의 사상자가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