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에드몽 델푸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이름
| 모리스 에드몽 델푸르
(Maurice Edmond Delfour) |
생년월일
| |
사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리스오랑이스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72cm / 75kg
|
등번호
| -[2]
|
소속팀
| |
국가대표
| 41경기 / 2골(1929-1938)
|
감독
| FC 루앙 (1943-1945)
레드 스타 파리 (1945-1946) KAA 라강투아 (1946-1951) 스타드 프랑세 (1952-1953) 르아브르 AC (1954-1955) KAA 라강투아 (1956-1958) 세르클러 브뤼허 KSV (1958-1962) 위니옹 생갈루아 (1962-1964) USC 코르티 (1964-1966) CS 암맘 리프 (1966-1969) SC 바스티아 (1969-1970) |
1. 생애
1.1. 선수 생활
14살 무렵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1928년에 스타드 프랑세에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0년에는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라싱 클루브의 새로운 회장이었던 장베르나르 레비(Jean-Bernard Lévy)는 스타 선수들을 많이 끌어 모아 팀의 전력을 강화할 방법을 생각해냈고 그 결과물이 에드몽 델푸르 외에도 마누엘 아나톨, 에밀 베낭트, 라울 디아뉴 등이었다. 델푸르는 첫 시즌에 나름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가장 중요한 시합이던 FC 세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부침이 있었다.
프랑스 축구계가 본격적으로 프로화된 1932년 무렵, 라싱 클뢰브는 강팀이었지만 1934년부터는 내리막을 걸어갔다. 그를 막기 위해 클럽은 1934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지 킴튼을 팀의 감독으로 데려왔고 덕분에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델푸르의 자리는 없어졌고 1937년 결국 라싱 클뢰브를 떠났다.
1937년 RC 루베로 팀을 옮긴 델푸르는 팀을 1부 리그 8위에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 RC 루베는 말 그대로 폭망했고, 강등당했다. 1939년에는 FC 루앙으로 자리를 옮긴 조지 킴튼의 부름을 받았고 1943년부터 델푸르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프랑스 축구계가 본격적으로 프로화된 1932년 무렵, 라싱 클뢰브는 강팀이었지만 1934년부터는 내리막을 걸어갔다. 그를 막기 위해 클럽은 1934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지 킴튼을 팀의 감독으로 데려왔고 덕분에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델푸르의 자리는 없어졌고 1937년 결국 라싱 클뢰브를 떠났다.
1937년 RC 루베로 팀을 옮긴 델푸르는 팀을 1부 리그 8위에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 RC 루베는 말 그대로 폭망했고, 강등당했다. 1939년에는 FC 루앙으로 자리를 옮긴 조지 킴튼의 부름을 받았고 1943년부터 델푸르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2. 국가대표
1929년에 델푸르는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곧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다. 첫 경기였던 멕시코 전에서 델푸르는 앙드레 마시노의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하는 활약을 펼쳤다. 다음 경기였던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기습적인 슈팅으로 골대를 맞추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세 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팀의 탈락을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는 대회에서 탈락한 이후에도 남아메리카에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8월 1일에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는데[3] 선제골을 포함하여 프랑스의 2골을 모두 뽑아내었다. 하지만 팀은 3대2로 패배하였다.
1934년 월드컵을 즈음해서는 델푸르가 알렉스 테포, 에티엔 마틀레르 등과 함께 프랑스 대표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당대 우승후보 1순위이던 오스트리아였고 결국 프랑스는 2대3으로 패배하였다.
자국 월드컵에서 그는 다시 한 번 프랑스의 대표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만났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41회의 출전 수는 1920년대의 스타 쥘 데바케스와 타이 기록이었고 15회는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프랑스는 대회에서 탈락한 이후에도 남아메리카에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8월 1일에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는데[3] 선제골을 포함하여 프랑스의 2골을 모두 뽑아내었다. 하지만 팀은 3대2로 패배하였다.
1934년 월드컵을 즈음해서는 델푸르가 알렉스 테포, 에티엔 마틀레르 등과 함께 프랑스 대표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당대 우승후보 1순위이던 오스트리아였고 결국 프랑스는 2대3으로 패배하였다.
자국 월드컵에서 그는 다시 한 번 프랑스의 대표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만났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41회의 출전 수는 1920년대의 스타 쥘 데바케스와 타이 기록이었고 15회는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1.3. 감독 생활
1939년 델푸르는 FC 루앙으로 이적했고 1943년부터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조지 킴튼 감독이 나치에 의해 구금되어 버리는 바람에 델푸르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델푸르의 활약으로 FC 루앙은 당시 전쟁통으로 쪼개진 프랑스 북부 리그에서 최고의 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1945년에 다시 킴튼 감독이 루앙으로 돌아왔고 델푸르는 레드 스타 파리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마지막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선수로서는 은퇴하고 본격적인 감독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의 행선지는 벨기에의 KAA 헨트였고 이후 감독으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마지막 감독자리였던 바스티아에서는 최악의 성적표로 장 뱅상에게 자리를 넘겨주기도 했다.
그의 행선지는 벨기에의 KAA 헨트였고 이후 감독으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마지막 감독자리였던 바스티아에서는 최악의 성적표로 장 뱅상에게 자리를 넘겨주기도 했다.
1.4. 은퇴 이후
2. 뒷이야기
- 후손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축구계를 떠난 이후로는 잊혔었다. 지금은 고향의 체육관과 축구 토너먼트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3. 수상
3.1. 클럽
- 프랑스 북부 리그[5] 우승 2회: 1940, 1945(FC 루앙)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 1935-36(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회: 1945-46(레드 스타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