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
2. 상세
본래 서원은 조선 왕조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조들을 배향하며 충효예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유림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꼽힌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학교 및 대학원급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충효예의 교육과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 그리고 유교의 전통성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 양성/충효예 교육/선현의 배향 등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신분제도가 고착화되고 붕당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가문/학연/지연/사제관계에 관계된 온갖 비리와 부패가 난무하게 되었고, 선현 배향 문제도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만한 인물이 아닌데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등의 폐단이 심해졌으며[1], 더구나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제사비용 징수 등의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 막장이 되어버린다. 탈세와 군역회피는 당연히(?) 따라붙었다.
이 문제가 조정까지 전해지게 되면서 숙종 조(재위 1674년 - 1720년)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 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화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 시절에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 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낙인되어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1863년 고종(재위 1864년 - 1907년)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텃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 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병폐/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으며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철폐 반대소를 꾸짖으면서 곧 사그라들었고, 유림들이 한강에 몰려들어 통곡했다는 야사와는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던 순간에 흥선대원군의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들의 반응은 표면상으로는 오히려 조용했다. 유림들의 대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흥선 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은 만들고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에도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만을 존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고 퇴출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1865년에 이르자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시작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으며 남은 서원들마저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일부 소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위와 명분에 유림 세력이 굴복하긴 했어도 서원을 600개나 닫아버린 대원군의 강단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대원군 반대파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서원을 마구잡이로 닫아버린 것의 폐단이 심하다고 비판하곤 했다. 나중에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주세요~라고 하는 정신나간 양반은 없었고 화양서원이나 만동묘같은 상징적인 서원들의 복구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고 나머지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써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이 "너네는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느냐?"라고 비웃으면서[2] 결국 시들해졌고 유림이 곧 한국사의 주도 세력에서 탈락하면서 서원 복구 요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본래 서원의 수는 650개였으나 나머지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를 넘겼지만, 사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현지 유력자의 의지로 소리소문없이 복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중 소수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파괴로 사라졌고,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복원되기도 했지만 광복 직후 6.25 전쟁 당시 파괴되기도 했고, 남북분단으로 인해 일부는 북한으로 넘어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많다.
현대의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한반도 전역에 남은 서원은 47곳이며 이 중 남한에 36곳이 남아있고, 북한에 11곳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는 80개 정도로 늘어났는데 이는 유림들이 복원했거나 복원을 추진 중인 곳이다. 그 외 나머지는 관련 유림도 없는 데다가 기록도 완전히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일부는 서원 터만 남았을 뿐이다.
초기의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 양성/충효예 교육/선현의 배향 등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신분제도가 고착화되고 붕당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가문/학연/지연/사제관계에 관계된 온갖 비리와 부패가 난무하게 되었고, 선현 배향 문제도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만한 인물이 아닌데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등의 폐단이 심해졌으며[1], 더구나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제사비용 징수 등의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 막장이 되어버린다. 탈세와 군역회피는 당연히(?) 따라붙었다.
이 문제가 조정까지 전해지게 되면서 숙종 조(재위 1674년 - 1720년)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 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화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 시절에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 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낙인되어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1863년 고종(재위 1864년 - 1907년)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텃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 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병폐/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으며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철폐 반대소를 꾸짖으면서 곧 사그라들었고, 유림들이 한강에 몰려들어 통곡했다는 야사와는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던 순간에 흥선대원군의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들의 반응은 표면상으로는 오히려 조용했다. 유림들의 대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흥선 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은 만들고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에도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만을 존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고 퇴출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1865년에 이르자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시작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으며 남은 서원들마저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일부 소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위와 명분에 유림 세력이 굴복하긴 했어도 서원을 600개나 닫아버린 대원군의 강단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대원군 반대파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서원을 마구잡이로 닫아버린 것의 폐단이 심하다고 비판하곤 했다. 나중에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주세요~라고 하는 정신나간 양반은 없었고 화양서원이나 만동묘같은 상징적인 서원들의 복구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고 나머지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써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이 "너네는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느냐?"라고 비웃으면서[2] 결국 시들해졌고 유림이 곧 한국사의 주도 세력에서 탈락하면서 서원 복구 요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본래 서원의 수는 650개였으나 나머지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를 넘겼지만, 사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현지 유력자의 의지로 소리소문없이 복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중 소수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파괴로 사라졌고,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복원되기도 했지만 광복 직후 6.25 전쟁 당시 파괴되기도 했고, 남북분단으로 인해 일부는 북한으로 넘어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많다.
현대의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한반도 전역에 남은 서원은 47곳이며 이 중 남한에 36곳이 남아있고, 북한에 11곳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는 80개 정도로 늘어났는데 이는 유림들이 복원했거나 복원을 추진 중인 곳이다. 그 외 나머지는 관련 유림도 없는 데다가 기록도 완전히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일부는 서원 터만 남았을 뿐이다.
3. 서원 목록
3.1. 남한
3.1.1. 서울특별시
3.1.2. 부산광역시
3.1.3. 인천광역시
3.1.4. 대전광역시
3.1.5. 대구광역시
- 구암서원 (북구)
- 낙동서원 (달서구)
- 녹동서원(달성군)
- 덕산서원(수성구)
- 동산서원 (동구)
- 매양서원 (북구)
- 병암서원 (달서구)
- 봉산서원 (수성구)
- 서계서원 (북구)
- 송담서원 (달성군)
- 오천서원 (수성구)
- 용강서원 (달서구)
- 용호서원 (달성군)
- 이강서원 (달성군)
- 이양서원 (달성군)
- 인흥서원 (달성군)
- 청호서원 (수성구)
- 한천서원 (달성군)
- 화암서원 (북구)
3.1.6. 울산광역시
3.1.7. 광주광역시
3.1.8. 강원도
- 경행서원 (동해시)
- 구봉서원 (춘천시)
- 광암서원 (원주시)
- 노동서원 (홍천군)
- 도포서원 (춘천시)
- 동명서원 (양양군)
- 매봉서원 (횡성군)
- 산양서원 (삼척시)
- 오봉서원 (강릉시)
- 용산서원 (동해시)
3.1.9. 경기도
3.1.10. 충청남도
3.1.11. 충청북도
3.1.12. 전라북도
3.1.13. 전라남도
- 경현서원 (나주시)
- 대계서원 (보성군)
1657년 문강공(文康公)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 선생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1704년(숙종 30년)에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지만, 2012년 11월 10일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전남 보성군 보성읍 동암2길 100에 다시 복설함. - 계송서원 (영광군)
- 고산서원 (여수시)
- 내산서원 (영광군)
- 녹동서원 (영암군)
- 도원서원 (화순군)
- 무령서원 (영광군)
- 봉암서원 (장성군)
- 방산서원 (구례군)
- 설재서원 (나주시)
- 송계서원 (장성군)
- 옥계서원 (순천시)
- 옥천서원 (순천시)
- 용강서원 (순천시)
- 자산서원 (함평군)
- 죽정서원 (영암군)
- 재동서원 (고흥군)
- 해촌서원 (해남군)
- 호암서원 (나주시)
3.1.14. 경상북도
- 광남서원 (포항시)
- 금곡서원 (예천군)
- 노동서원 (울진군)
- 동락서원 (구미시)
- 명계서원 (울진군)
- 매림서원 (고령군)
- 반암서원 (고령군)
- 사양서원 (청송군)
- 사양서원 (칠곡군)
- 삼계서원 (봉화군)
- 섬계서원 (김천시)
- 소양서원 (문경시)
- 송학서원 (청송군)
- 오천서원 (포항시)
- 옥천서원 (성주군)
- 용강서원 (청도군)
- 용산서원 (경주시)
- 이산서원 (영주시)
- 장산서원 (경주시)
- 조곡서원 (경산시)
- 회연서원 (성주군)
3.1.15. 경상남도
- 낙산서원 (의령군)
3.1.16. 제주도
3.2. 북한
아쉽게도 대한민국 국적자는 현재로서는 갈 수 없거나 직접 볼 수 없는 서원들이다. 현재 남포,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는 서원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3.2.1. 평양
3.2.2. 개성
3.2.3. 강원도(북한령)
- 충렬서원 (김화)
1650년 창건, 1652년 사액. 홍명구(병자호란 때 순절)를 배향했고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