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
2. 생애
부여의 현왕과의 관계는 확실치 않으나, 부여울이 '옛 부여왕(故扶餘王)'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 다만 그가 부여에서 현왕과 같이 끌려온 것인지 모용황의 딸과 결혼해 낳은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0년, 부견의 대군이 전연의 수도 업성을 포위하자 당시 산기시랑이던 그는 고구려 및 상당의 인질 5백여명과 함께 업성 북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맞이하면서 전연 멸망에 큰 기여를 한다. 이후 전진에 정착하여 지내고 있었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으로 패배하고 모용수가 다음 해 후연을 건국하자, 부여울은 모용수에게 붙어 형양 태수의 관직을 받는다. 그는 창려 일대에서 영향력이 컸는지, 창려 일대의 선비족과 여러 부락이 모용수에게 귀순했다. 더불어 모용수는 동년 정월에 그를 정동장군, 통부좌사마, 부여왕으로 삼았다.[1] 군사를 관할하는 통부좌사마의 관직에 임용된 걸 보면 자체 동원 가능한 군사력도 어느 정도 있던 모양.
392년, 우광록대부 벼슬에 있다가 좌복야로 승진하고, 396년에는 태부까지 되지만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다만 태부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내려지는 것을 고려하면 이 해에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
370년, 부견의 대군이 전연의 수도 업성을 포위하자 당시 산기시랑이던 그는 고구려 및 상당의 인질 5백여명과 함께 업성 북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맞이하면서 전연 멸망에 큰 기여를 한다. 이후 전진에 정착하여 지내고 있었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으로 패배하고 모용수가 다음 해 후연을 건국하자, 부여울은 모용수에게 붙어 형양 태수의 관직을 받는다. 그는 창려 일대에서 영향력이 컸는지, 창려 일대의 선비족과 여러 부락이 모용수에게 귀순했다. 더불어 모용수는 동년 정월에 그를 정동장군, 통부좌사마, 부여왕으로 삼았다.[1] 군사를 관할하는 통부좌사마의 관직에 임용된 걸 보면 자체 동원 가능한 군사력도 어느 정도 있던 모양.
392년, 우광록대부 벼슬에 있다가 좌복야로 승진하고, 396년에는 태부까지 되지만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다만 태부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내려지는 것을 고려하면 이 해에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
[1] 여기서 '부여왕'이라는 칭호는 부여 지역의 제후로 삼은 게 아니라 그냥 명예직이다. 왜냐하면 기록에서 부여울은 주로 하북성 지역에서 활동한 반면 부여의 중심지인 녹산과 부여성이 있던 눙안 지역하고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