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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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혁
건립은 6세기 고구려 때로, 평양 중성의 서문으로 건립되었다. 조선 초에 개축되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건축 양식은 고려 시대 양식을 따른다. 채제공이 50세 때 평안감사가 되어 보통문을 중수하고 낙성할 때 지은 보통문 중건기(普通門重建記)가 남아 있다.
평양의 국방과 교통의 관문으로 대접받았으며, 이 점에서도 숭례문과 포지션이 겹친다. 1960년대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를 설계할 때 보통문을 사거리 한복판에 두고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보통문 거리가 동쪽, 남쪽, 북쪽으로 뻗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에 있는 보통강 다리로 이어지도록 배치되었다. 평양 구시가와 신시가를 잇는 중심에 보통문이 위치하고 있는 셈. 조선 시대에는 보통송객(普通送客, 보통강 나루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장면)이 평양팔경(평양의 여덟 가지 볼거리)의 하나로 유명했는데, 현재는 보통문 누마루에서 보통강 너머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무한성류경호텔인지라... 안습.[2]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은 북측의 수도인 평양을 세 차례에 걸쳐서 대공습작전을 진행하였고, 쑥을 재배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평양은 폭격으로 쑥대밭으로 변하였다. 1952년에 진행된 1차부터 3차까지의 대공습작전 동안 저 때 멀쩡하게 서있던 건물이 단 두 채였다는데 그게 어떤 초가집이랑 저 보통문이라고 한다.[3] 이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라이벌 도시(?)[4]의 상징적인 문인 숭례문이 안타깝게도 방화 사건으로 크게 불탄 뒤 복원되었지만, 이 보통문만은 조선 초에 지어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5] (그리고 6.25 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아 신문(神門)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이렇게 살아남은게 얼마나 기적인지 와닿지 않는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와 베들린의 사진을 보면된다. 소이탄과 네이팜탄으로 폭격해서 남아있더라도 불바다가 되는것이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
평양의 국방과 교통의 관문으로 대접받았으며, 이 점에서도 숭례문과 포지션이 겹친다. 1960년대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를 설계할 때 보통문을 사거리 한복판에 두고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보통문 거리가 동쪽, 남쪽, 북쪽으로 뻗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에 있는 보통강 다리로 이어지도록 배치되었다. 평양 구시가와 신시가를 잇는 중심에 보통문이 위치하고 있는 셈. 조선 시대에는 보통송객(普通送客, 보통강 나루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장면)이 평양팔경(평양의 여덟 가지 볼거리)의 하나로 유명했는데, 현재는 보통문 누마루에서 보통강 너머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은 북측의 수도인 평양을 세 차례에 걸쳐서 대공습작전을 진행하였고, 쑥을 재배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평양은 폭격으로 쑥대밭으로 변하였다. 1952년에 진행된 1차부터 3차까지의 대공습작전 동안 저 때 멀쩡하게 서있던 건물이 단 두 채였다는데 그게 어떤 초가집이랑 저 보통문이라고 한다.[3] 이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라이벌 도시(?)[4]의 상징적인 문인 숭례문이 안타깝게도 방화 사건으로 크게 불탄 뒤 복원되었지만, 이 보통문만은 조선 초에 지어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5] (그리고 6.25 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아 신문(神門)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이렇게 살아남은게 얼마나 기적인지 와닿지 않는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와 베들린의 사진을 보면된다. 소이탄과 네이팜탄으로 폭격해서 남아있더라도 불바다가 되는것이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