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성왕 시기의 귀족
苩加
(? ~ 502)
백제 동성왕, 무령왕 대의 대신이자 반역자.
백제의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백씨 가문 출신의 귀족이였다.
486년 2월에 동성왕은 백가를 위사좌평(衛士佐平, 오늘날의 대통령경호처장과 유사.)에 임명하였다. 이후 501년 8월에 동성왕은 가림성(加林城)[1]을 새로 축조하고 백가를 발령보내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가는 가고 싶지 않아서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면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백가는 왕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해 11월에 동성왕이 웅진의 복원에서 사냥을 하고 또한 사비서원에서 사냥을 하던 중에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에 유숙하게 되었다. 백가는 이 틈을 타서 사람을 시켜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니 12월에 결국 동성왕은 백가가 보낸 자객들에게 시해당하였다.
502년 정월에 백가는 가림성에 웅거하여 모반하였는데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우두성에 이르어 한솔 해명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해명의 진압군에게 크게 패한 백가는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으나 무령왕은 그의 목을 베고 시체를 백강에 버렸다.
본래 백가는 문주왕 대에 천도한 새 수도인 웅진과 그 옆의 사비 일대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던 세 귀족가문(사씨, 연씨, 백씨)의 일원이었다. 동성왕은 기존의 강력해진 귀족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웅진의 신진 귀족세력들을 등용했는데 백가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진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 대표자격인 백가를 세력기반인 수도 웅진에서 동떨어진 가림성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백가가 이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무령왕은 백가의 난을 진압하면서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실추된 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 ~ 502)
백제 동성왕, 무령왕 대의 대신이자 반역자.
백제의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백씨 가문 출신의 귀족이였다.
486년 2월에 동성왕은 백가를 위사좌평(衛士佐平, 오늘날의 대통령경호처장과 유사.)에 임명하였다. 이후 501년 8월에 동성왕은 가림성(加林城)[1]을 새로 축조하고 백가를 발령보내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가는 가고 싶지 않아서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면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백가는 왕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해 11월에 동성왕이 웅진의 복원에서 사냥을 하고 또한 사비서원에서 사냥을 하던 중에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에 유숙하게 되었다. 백가는 이 틈을 타서 사람을 시켜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니 12월에 결국 동성왕은 백가가 보낸 자객들에게 시해당하였다.
502년 정월에 백가는 가림성에 웅거하여 모반하였는데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우두성에 이르어 한솔 해명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해명의 진압군에게 크게 패한 백가는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으나 무령왕은 그의 목을 베고 시체를 백강에 버렸다.
본래 백가는 문주왕 대에 천도한 새 수도인 웅진과 그 옆의 사비 일대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던 세 귀족가문(사씨, 연씨, 백씨)의 일원이었다. 동성왕은 기존의 강력해진 귀족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웅진의 신진 귀족세력들을 등용했는데 백가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진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 대표자격인 백가를 세력기반인 수도 웅진에서 동떨어진 가림성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백가가 이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무령왕은 백가의 난을 진압하면서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실추된 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