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사건의 경과
2.1. 명나라의 쇠퇴
2.2. 후금의 성장
2.3. 전쟁의 시작
1618년 4월, 후금군이 명나라 푸순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1619년 사르후 전투의 대승과 함께 마지막 남았던 해서여진의 예허부까지 복속시키며 여진을 완전히 통일한다.
2.4. 명군의 반격
2.5. 몽골과 조선의 복속
2.6.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2.7. 오삼계의 투항과 청나라의 북경 입성
2.8. 남명의 멸망
2.9. 부록 : 삼번의 난과 정씨 왕국
3. 영향
3.1. 중국
청은 원나라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중국대륙 전체를 정복한 이민족 왕조가 되었고 한족들은 몽골족에 이어 만주족을 섬겨야만 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나서 한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풍습인 변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저항하는 한족들은 탄압하였다. 반대로 가혹한 통치로 인해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교훈을 참고했는지 한족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유화책도 실시하여 중국을 200년 넘게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화약무기 개량에 소극적이었고 외국과 최소한의 교류를 제외한 쇄국정책을 고수한 결과 근대화에 뒤쳐져 나중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자의 옥 등 한족 탄압정책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한족들이 겉으로만 청에 충성하고 속으로는 멸만흥한의 사상을 품으면서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명을 정복하고 나서도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실시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위구르, 북쪽으로는 몽골을 장악하여 현재 연해주일대[1]와 외몽골[2]을 제외한 오늘날 중국 영토의 원형을 확정시켰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나서 한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풍습인 변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저항하는 한족들은 탄압하였다. 반대로 가혹한 통치로 인해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교훈을 참고했는지 한족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유화책도 실시하여 중국을 200년 넘게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화약무기 개량에 소극적이었고 외국과 최소한의 교류를 제외한 쇄국정책을 고수한 결과 근대화에 뒤쳐져 나중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자의 옥 등 한족 탄압정책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한족들이 겉으로만 청에 충성하고 속으로는 멸만흥한의 사상을 품으면서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명을 정복하고 나서도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실시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위구르, 북쪽으로는 몽골을 장악하여 현재 연해주일대[1]와 외몽골[2]을 제외한 오늘날 중국 영토의 원형을 확정시켰다.
3.2. 조선
명청교체기는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수습하던 광해군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후금과의 마찰을 피하려 중립외교를 취했고 이것이 명과의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서인 정권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던 인조정권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삼전도의 굴욕을 받는 동시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갔다.[3]
그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던 인조정권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삼전도의 굴욕을 받는 동시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갔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