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수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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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흥수아이.jpg

1. 개요2. 발견 과정3. 상세4. 김흥수의 근황5. 논란6. 바깥 고리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당시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유골이다. 대표적인 한반도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유골. 발견자인 김흥수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라고 불린다.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4~6살짜리 아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2. 발견 과정[편집]

옛날에 '김흥수(金興洙)'라는 석회석 광산 운영자가 있었다. 흥수아이 발견 전에도 1978년에 운영 도중 곰 뼈와 상아같은 동물 뼈들을 엄청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가 발굴을 시작했으며 이 교수는 늘 '사람뼈'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1982년, 그가 석회동굴 주변에서 땅을 고르다가 두루봉 동굴에서 어린아이의 두개골과 유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유골을 신고하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광산이 폐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흘동안 고민했다. 고심 끝에 김흥수는 같은 해 12월 5일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에게 '사람 이빨 같은 것이 나왔다."고 전화로 신고했다. 출처

발굴은 1982년 12월1983년 1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시남부락의 두루봉에 있는 여러 동굴들 중 두루봉 조사의 10차 발굴로 이루어진 ‘흥수굴(興洙窟)’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를 기리고 보답하기 위해 동굴의 이름을 '흥수굴', 그 유골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라고 짓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 이름을 유적 이름에 명명한 첫 사례이다.

3. 상세[편집]

두루봉 동굴군에 속해 있는 이 흥수굴은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발굴된 가장 이상적인 문화 성격을 지닌 동굴 유적이며 두루봉 9굴 주위의 파괴된 동굴이다.

여기서 후기 홍적세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2개체의 뼈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인류화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시대 어린 아이들의 뼈화석이며, 흥수아이 제1호, 제2호로 이름붙여졌다.

흥수아이는 김흥수가 최초 발견 당시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며 해골의 뒤통수가 튀어나와 있었다.

흥수아이의 옆에는 꽃을 꺾은 듯한 흔적과 꽃가루가 있었는데 감식 결과 국화였다고 한다. 또, 흥수아이의 위에는 고운 흙이 뿌려져있었다.

흥수아이 제1호 사람뼈화석은 붉은 영토층에서 60% 이상이 남아 있었다. 제2호는 머리는 없어지고 몸체만이 발견되어서 해부학상의 특징에 대한 연구는 흥수아이 제1호 사람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흥수아이의 나이는 4∼6살, 머리 크기는 1200∼1300㏄, 키는 110∼120㎝로 선사 아이와 현대 아이 머리뼈의 특징이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 아이의 특징인 뒷머리뼈혹(bunning), 두툼한 눈두덩, 낮은 머리뼈 등은 없다. 체질상 특징상,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늦은 시기의 현생인(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4. 김흥수의 근황[편집]

김흥수의 광산은 1985년에 폐광되었으며, 1988년에 메리츠화재에 취직해서 2015년 기준 보험 업무를 하고있다. 당뇨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홀로 살고 있다.

비록 금전적인 손해는 컸지만 '흥수아이'로 역사에 이름을 남겨서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했다. 출처

5. 논란[편집]

수차례 절대 연대 측정에 알수없다는 결과도 나왔으며, 프랑스 연구진은 조선시대로 보기도 한다.논문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연 학술포럼에서 이 유골이 구석기시대 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흥수아이를 구석기시대 인골이라고 보기도, 프랑스 학자가 주장한 조선시대 인골로 보기도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기사

구석기 시대 일반적인 매장 방식과 달리 특별한 흔적이나 부장품이 없었고, 치아에 충치가 많았던 것은 구석기 시대가 아닌 곡물을 주식으로 한 농경사회 이후 유골이라는 가설을 뒷받침 해준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 이후에 묻힌 유골일 가능성도 나왔다.

하지만 농경 사회의 증거인 세계 최초의 볍씨(1만 3000년~1만 5000년 전,구석기 시대)가 흥수아이와 같은 지역인 충청도 청주시에서 발굴되었으며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소와 애리조나대와 서울대 AMS 연구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국내외4개 연구기관에서 흙과 볍씨, 토탄 등을 시료로 해서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 교차검증 하였으며 모두 동일한 결과를 얻어냈다. 볍씨가 많이 출토된 2토탄층의 화분 분석 자료는 ‘상대적으로 온난 습윤한 저습지에 형성된 토탄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나무분석 자료를 봐도 오리나무-밤나무 류의 낙엽활엽수가 주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던 알레뢰드/뵈링 간빙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빙하기이기에 농사가 불가능 하여 수렵과 채집만 하던 시대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1998년 ‘소로리 토탄층의 보존’을 일축해버린 문화재위원회의 처사가 두고두고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청주시 소유지가 된 보존지역이 약간 남아있지만 다른 공장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토탄층 발굴은 쉽지 않다. 적어도 10~15m 이상의 깊이에 200㎡(10×20m) 면적을 발굴하기는 턱없이 좁다. 이융조 교수는 “폐교된 인근 소로분교를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소로리 주변 지역의 농지에 대한 학술발굴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또 안승모 교수는 “소로리와 비슷한 중부지역 토탄층에서 학술발굴이 계속 이어져서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닌게 아니라 달랑 소로리 한 곳의 자료 뿐이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소로리와 비슷한 환경의 다른 지역 토탄층들을 발굴해서 관련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여 논란을 해소하고 국제적 고고학적 성과로 인정 받기 위해 추가 연구가 필요 하다. 출처
하지만 소로리 볍씨가 구석기 시대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지만 프랑스의 흥수아이의 절대 탄소연대 측정에서 조선시대로 나온만큼 발굴당시 경화제로 시료가 오염된 유물에 대해 과학기술을 통한 제대로된 연대측정이 필요하다.

특히 흥수아이가 발견된 '3ㄴ층'은 1천500여점의 구석기 시대 석기가 출토 됐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연모가 출토되고 사용흔적이 모두 밝혀져 이 층에서 인류가 장기간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출처

하지만 매장이 일단 땅을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3ㄴ층'에 놓여진 유물이 같은 연대라 할 수 있는가 의문, 앞서말한 절대연대 측정시 조선시대로 나온 프랑스 논문, 하지만 흥수아이 인골 아래층에서 발견된 숯시료의 연대가 12,100 년 전으로 나오거나 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더 확실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참고당시 발굴 이후 경제적 이유로 현재 현장 보존이 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한국 고고학 유적지로써 아쉬움이 크다.참고

6. 바깥 고리[편집]

7.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