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배경
1955년 서독의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기독교민주연합)는 소련을 제외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어떠한 외교관계도 갖지 않겠다하나의 독일 원칙?!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선언한다. 서독만이 독일 내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에서 나온 이러한 외교 원칙은 서독의 지위를 강화함과 동시에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각종 문제점이 등장했고 특히나 이 원칙으로 인해 서독 자신들의 행동이 제약을 받는 경우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여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을 비판하면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서베를린의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건립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던 사민당 총재 빌리 브란트는 할슈타인 원칙은 두 개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이며, 동독 공산당의 입지만 강화시켜줄 뿐이라면서 적극적인 외교노선 개선을 요구하였다.
3.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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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동독 수상 빌리 슈토프와 역사적인 첫 동서 정상회담을 여는 빌리 브란트의 모습 |
기민련과 사민당이 손잡은 쿠르트 키징어(기민련)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이미 동방 정책의 실시를 강하게 주장한[1] 빌리 브란트가 1969년 수상으로 취임함에 따라 동방 정책은 본격적으로 실행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첫 대상은 할슈타인 원칙 시절에도 이미 수교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4. 이후
1974년 빌리 브란트 수상의 개인 비서인 귄터 기욤이 동독의 첩보원이란게 밝혀지는 희대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빌리 브란트는 사임하였지만, 뒤를 이어 수상에 오른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는 꿋꿋히 동방 정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82년 정권교체로 수상에 오른 우파 기민당의 헬무트 콜도 동방 정책을 계승 및 발전시켜 나가면서 결국 독일 통일에 이른다.
5. 여담
- 독일 우파인 기민당 혹은 기사당과 독일 좌파인 사민당은 누가 집권하던지 간에 동방정책을 수행했으나 양 정당의 동방정책 기준은 확연하게 다르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의 좌파들은 독일이 통일되어서 강해지면 세계대전과 같은 무력을 기반으로 한 팽창주의가 된다고 보았다. 이는 1차 및 2차 대전을 통하여 입증된 형태였기 때문에 사민당이 추구하는 동방정책은 독일의 지속적인 영구분단 형태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기민당과 같은 우파는 독일의 동유럽 공산권에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 및 독일 통일에 대한 기반을 추구하는 형태로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