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에 코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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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니콜라에 코바치
(Nicolae Kovács)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국적
출신지
메하디아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4cm / 73kg
등번호
소속팀
바나툴 티미쇼아라 (1928-1930)
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930-1931)
CA 오라데아 (1931-1935)
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935)
발랑시엔 (1935-1936)
CA 오라데아 (1936-1938)
트리콜로르 플로이에슈티 (1938-1940)
너지바러디 AC (1941-1942)
검머 부다페스트 (1943-1945)
페러르 클루지 (1945-1947)
크리샤나 오라데아 (1947)
국가대표
37경기 / 6골 (1929-1938 / 루마니아)
1경기 / 1골 (1941 / 헝가리)
감독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46-1947)
페러르 클루지 (1947)
ICO 오라데아 (1948-1949)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 (1950-1953)
CSM 메디아슈 (1953-1954)
플라카라 페트로샤니 (1954)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1.1.2. 국가대표
1.2. 이후
2. 뒷이야기3. 가족4. 수상
4.1. 클럽4.2. 감독

1. 생애[2][편집]

1.1. 선수 생활[편집]

1.1.1. 클럽[편집]

코바치는 1924년부터 키네줄 티미쇼아라에서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했으며 1부 리그 데뷔는 1928년, 바나툴 티미쇼아라에서 했다.

그는 리펜시아 티미쇼아라를 거쳐 4년간 CA 오라데아에서 뛰었으며 1934-35 시즌 마지막 4경기엔 리펜쇼아 티미쇼아라에서 뛰면서 선수 커리어 중 유일한 우승을 맛보았다. 프랑스 발랑시엔 FC에서 1년을 보낸 코바치는 CA 오라데아에서 2시즌을 더 보내고 플로이에슈티에서 2년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너지바러디 AC와 검머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했으며 페러르 클루지를 거쳐 1947년, 크리샤나 오라데아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1.2. 국가대표[편집]

코바치는 1929년 9월 15일, 불가리아를 상대로 루마니아 대표팀에 데뷔했다.

코바치는 루마니아 대표팀 멤버로 총 37회 A매치에 참가했다. 그리고 코바치는 FIFA 월드컵 공식 보고서상으로 베르나르트 포르호프, 에드몽 델푸르, 에티엔 마틀레르와 더불어 30년대의 3차례 월드컵에 모두 출전한 유일한 루마니아 선수이자 4명의 선수 중 하나로 남았다.[3]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8년 월드컵 1라운드 쿠바전이었고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단 한번도 1라운드 이상에 올라가지 못했다.

1940년, 북부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로 넘어가면서 코바치는 1경기를 헝가리 대표팀으로 뛰었다.

1.2. 이후[편집]

코바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와 페러르 클루지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친정팀 오라데아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팀의 디비자 A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에서는 디비자 B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켰다.

2. 뒷이야기[편집]

  • 코바치는 초대 대회에서 페루를 상대로 한 첫경기의 쐐기골을 넣어 18세의 나이로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의 최연소 선수 마누엘 로사스(1912년 4월생)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득점에 성공하면서 그의 월드컵 최연소 득점 기록은 단 5일 만에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코바치의 득점 기록은 월드컵 최연소 득점 부문에서 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그보다 더 어린 득점자는 펠레, 마누엘 로사스, 마이클 오언 이 3명 밖에 없다.

3. 가족[편집]

  • 리누스 미헬스의 뒤를 이어 AFC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아 유러피안 컵 2연패를 이끈 명장 슈테판 코바치가 그의 동생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수로서는 형 니콜라에의 커리어가 훨씬 좋지만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는 동생 슈테판의 커리어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디비자 A 우승 1회: 1935-36(리펜시아 티미쇼아라)
  • 쿠파 로므니에이 우승 1회: 1935-36(리펜시아 티미쇼아라)

4.2. 감독[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개근 출전은 못했어도 3대회 모두 명단에는 들어간 선수로는 에밀 베낭트, 아르놀 바주가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