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내용[편집]
현재 이 무덤이 자리잡은 곳은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무덤자리에는 절의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남연군의 아들인 흥선대원군이 부친의 묘소를 이 자리로 안장할 때 가야사와 석탑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부친을 안장하였다고 한다. 대원군의 말에 따르면 풍수지리가 뛰어난 곳이라고 하여 이 곳을 부친의 묘소로 정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 때 없어진 절이 가야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남연군묘가 생기기 100여년 전에 가야사는 이미 완전히 소멸해서 터만 남아 있었고, 인근에 있엇던 절들이 가야사의 이름을 모칭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기석은 이하응이 불지른 절을 묘암사로 봤다. "대원군이 불태운 절 가야사 아니다"
묘는 비석과 봉분 방식으로 되어있는 묘소로, 역사적으로 이 곳은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하다. 독일 출신으로 인류학자를 자칭하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1868년 이 무덤에 잠입하여 보물을 도굴하려고 하였다가 근처 백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대원군에게 척양(斥洋)의식과 쇄국정책을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대한 내용은 오페르트 도굴사건 참조.
다만 이 때 없어진 절이 가야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남연군묘가 생기기 100여년 전에 가야사는 이미 완전히 소멸해서 터만 남아 있었고, 인근에 있엇던 절들이 가야사의 이름을 모칭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기석은 이하응이 불지른 절을 묘암사로 봤다. "대원군이 불태운 절 가야사 아니다"
묘는 비석과 봉분 방식으로 되어있는 묘소로, 역사적으로 이 곳은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하다. 독일 출신으로 인류학자를 자칭하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1868년 이 무덤에 잠입하여 보물을 도굴하려고 하였다가 근처 백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대원군에게 척양(斥洋)의식과 쇄국정책을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대한 내용은 오페르트 도굴사건 참조.
3. 바깥고리[편집]
4.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편집]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