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빈(恭懷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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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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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무송(茂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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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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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추증 좌의정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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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 음력
| 1550년? ~ 1592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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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 1550년? ~ 1592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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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1561년 ~ 1563년(빈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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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사후
창경궁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에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 당시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시신을 함춘원(含春苑)에 묻었다고 했으나 그가 이미 죽은 뒤라 덕빈의 남동생 윤백상에게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1603년, 결국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2]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
1603년, 결국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2]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