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강유홍은 평안도 출신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일본으로 건너 오기 전의 생애 전반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자유노동자가 되어 재일조선노총, 관동자유노조,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토목건축노동조합에 차례로 소속되었다. 이후 전협 토건본부 상임위원이 된 그는 토건본부 지방 조직책으로 관동(關東), 북륙(北陸), 산리(山梨) 지방에 파견되어 각 지방 지부의 재건과 창립에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1932년 4월, 강유홍은 이와테현 게센군 야하기무라 대선도선철도 공사장에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김범이(金凡伊)와 함께 파견되었다. 당시 이와테현 작업장은 전협 토목건축노동조합의 지도하에 자유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있었으며, 지도부인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이끈 이는 한인 60여 명과 일본인 4명이었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노동시간의 단축, 임금인상, 부상수당, 해고반대 등이었다.
강유홍은 4월 28일 업무 중지를 선언하고 현장에서 대회를 열어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자 당황한 유전조(有田組)는 경찰, 소방대 등을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5월 2일부터 파업 진압이 시작되어 100여 명의 폭력단이 투입되었다. 이에 강유홍은 선두에서 이들에 맞서 파업 노동자들을 인도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4일 저녁, 폭력단은 술을 마시고 파업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유홍은 폭력단을 피하여 동지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폭력단이 쫓아와 몽둥이를 휘둘렸다. 강유홍은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또다른 동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폭력단은 다시 쫓아와 강유홍을 구타해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전협 토건본부는 5월 8일 대책 회의를 열고 5월 9일 대책위원을 파견하였다. 대책위원회는 해방운동 희생자 구원회 변호사단의 협조를 얻어 폭력단 가운데 53명을 살인죄, 소요죄, 상해죄로 기소시킬 수 있었다. 대책위원회는 아리다구미에게 부상자 위문금은 받아서 전달하였으나 사망자에 대한 위자료는 유족의 거주지를 알 수가 없어 전달할 수 없었다. 이후 6월 8일 강유홍을 비롯한 사망자 3명의 장례식과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19465년 6월 재일조선인연맹이 희생자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당시의 참혹한 사실을 기록한 사진집 <해방(解放)>을 8월에 간행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강유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32년 4월, 강유홍은 이와테현 게센군 야하기무라 대선도선철도 공사장에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김범이(金凡伊)와 함께 파견되었다. 당시 이와테현 작업장은 전협 토목건축노동조합의 지도하에 자유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있었으며, 지도부인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이끈 이는 한인 60여 명과 일본인 4명이었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노동시간의 단축, 임금인상, 부상수당, 해고반대 등이었다.
강유홍은 4월 28일 업무 중지를 선언하고 현장에서 대회를 열어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자 당황한 유전조(有田組)는 경찰, 소방대 등을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5월 2일부터 파업 진압이 시작되어 100여 명의 폭력단이 투입되었다. 이에 강유홍은 선두에서 이들에 맞서 파업 노동자들을 인도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4일 저녁, 폭력단은 술을 마시고 파업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유홍은 폭력단을 피하여 동지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폭력단이 쫓아와 몽둥이를 휘둘렸다. 강유홍은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또다른 동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폭력단은 다시 쫓아와 강유홍을 구타해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전협 토건본부는 5월 8일 대책 회의를 열고 5월 9일 대책위원을 파견하였다. 대책위원회는 해방운동 희생자 구원회 변호사단의 협조를 얻어 폭력단 가운데 53명을 살인죄, 소요죄, 상해죄로 기소시킬 수 있었다. 대책위원회는 아리다구미에게 부상자 위문금은 받아서 전달하였으나 사망자에 대한 위자료는 유족의 거주지를 알 수가 없어 전달할 수 없었다. 이후 6월 8일 강유홍을 비롯한 사망자 3명의 장례식과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19465년 6월 재일조선인연맹이 희생자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당시의 참혹한 사실을 기록한 사진집 <해방(解放)>을 8월에 간행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강유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