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6.25전쟁 전투 및 작전 목록)] [[분류:6.25 전쟁/전투]] [[파일:425 전투상황-도.png]] 현재 강원도 화천군 칠성전망대 인근에 있는 전투 상황도. [[http://mfis.mpva.go.kr/hokukModel/readHokukModelView.do?typo=1|출처: 국가보훈처]] [목차] == 개요 == [[파일:hwa7xx`406gozi.png]] 왼쪽 원은 425고지, 우측은 406고지 [[https://www.yna.co.kr/view/PYH20200614011300062|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두 고지들 - 출처]] 1953년 7월 20일[* 이는 [[금성 전투]]가 끝난 다음날이다.] 강원 철원군 원남면 일대에서 [[제7보병사단]] [[제8보병여단|8연대]] 1대대가 425고지에서, 그리고 [[제3보병여단|3연대]] 2대대가 406고지에서 중공군 135사단과 180사단을 맞이해 4일간 벌인 국군 한정[* UN군까지 합하면 24~26일 [[임진강]]변에서 미 해병대와 호주군(영연방군)이 중공군 1개 사단과 격돌한 3차 후크 고지 전투(사미천 전투)가 마지막이다. 참고로 52년에 벌어진 2차 후크 고지 전투는 고왕산 전투로 별칭한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참고로 425고지 쪽이 워낙 치열했기에 매체에서는 보통 425고지 쪽만 다루고 명칭도 '425고지 전투'로만 부르지만, 406고지 역시 휴전선을 정하는데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 전투 전 상황 ==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임박하자 [[김일성]]은 [[화천군|화천]] [[수력발전소]]를 절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 38선으로 분단될 당시 화천 지역은 북한 땅이었다.]에 혈안이 돼 있었고, 이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도 15개 사단을 2군단 전면에 투입하는 7.13 총공세에 돌입해 우선 [[금성 전투]]를 벌여 금성천 북쪽을 손에 넣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 역시 남한 전력 수요의 30% 가량을 생산할 수 있는 화천발전소를 절대 사수하라 명령하고는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방문해 독려했다. [[파일:7사단=백암산사나이=425고지.jpg]] [[https://www.youtube.com/watch?v=i_2ilPgqJjM|이미지 출처]] 그리고 전투의 무대가 된 425 고지와 406 고지는 '''주변 지형과 비교하면''' 거의 나즈막한 언덕이나 다름없어 [[우주방어]] 수준의 [[진지공사]]와 화력을 준비하지 않는 한 순식간에 돌파, 피탈당하기 딱 좋은 곳이라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는 서쪽의 602 고지와 연계된 8연대의 금성천 (별우지구) 주 방어선의 일부였기에 만약 여기를 잃을 경우 방어선이 붕괴돼 군사분계선이 화천발전소가 있는 [[파로호]]까지 밀려나거나[* 비록 정전을 앞두고 있었다지만 이는 양측 모두 합의해야 가능했고, 협정 역시 맺어질 듯 하다가도 한쪽의 반발이나 까다로운 조건으로 2년여간 늘어져 왔기에 이것만 먹으면 휴전해 주겠다는 식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심할 경우 화천발전소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7월 19일 밤 11시, 국군 7사단 3연대는 [[제8기동사단|8사단]]과 임무교대했고, 이 과정에서 8사단 출신 이규학[* 낙동강 전선 [[영천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있다 다리 관통상으로 후송된 뒤 1952년 7사단으로 배치돼 교육대 시범중대장을 거쳐 전방 중대장까지 됐다.] 대위의 6중대가 406고지로 이동했다. 한편 8연대도 [[제11기계화보병사단|11사단]] 13연대와 임무교대 후 김한준 대위의 1중대가 425 고지로 이동해 [[인수인계]] 및 [[진지공사]]를 시작했다. == 425 고지 전투 (7.20 ~ 7.22) == [[http://blog.naver.com/steelgun/220070501118|참고 자료1]] [[https://www.warmemo.or.kr/front/militaryInfo/searchView.do;jsessionid=745D1D8F5BF4706EF15E8C855354A584|참고 자료2]] 7월 20일 밤 10시 진지공사가 끝나고 대략 30여분 뒤 적의 [[공격준비사격]]으로 보이는 포화가 30분간 이어졌고, 이에 8연대 1중대 장병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참호 안으로 뛰어들어 견뎌냈다. 그 뒤 3개 중대 혹은 대대급 1파가 사방[* 1개 중대급은 고지 서북쪽의 구릉으로, 2개 중대급 무리는 동북쪽에서 왔다.]에서 몰려왔고, 이에 1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한편, 고지 위로 [[조명탄]]을 쏘아 피아 식별이 가능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는 포병들[* 20포병대대, 미 176 포병대대.]에게 차단사격[* 적의 통과를 저지하거나 방해, 방어를 무력화하기 위해 하는 일제 [[포격]]으로, [[https://ko.wikipedia.org/wiki/%ED%83%84%EB%A7%89_%EC%82%AC%EA%B2%A9|탄막 사격]]과의 차이점은 한번 쏜 뒤 다음 블록으로 재조정해 쏜다는 점이다.] 지시를 내려 적들을 패주시킨다. 7월 21일 새벽 2시 15분경 중공군 2파가 몰려왔는데, 이번엔 1중대의 425고지와 인접 2중대 능선 사이 협곡으로 침투해 425 고지 [[앞마당]][* 정확히 말하자면 1중대 본진인 425고지와 100야드 정도 떨어져 있는 별개의 전방 고지지만, 본진 바로 앞에 있기에 [[RTS]]에서 말하는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인 돌출고지에 [[수류탄]]을 마구잡이로 던져가며 주 진지 20~50야드 앞까지 접근해왔다. 이에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2소대와 각지의 [[박격포]], 중화기반들의 화력을 [[십자포화|협곡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중대본부 6,7명과 함께 협곡의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는 2소대를 지원하며 난전을 펼치다 정신을 잃게 되지만, 남은 중대원들의 분투에 의해 새벽 4시경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7월 22일 자정,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중공군 3파가 몰려왔고, 이에 1대대장은 화기중대에게 조명탄 발사 지시 및 1,2 중대에게 최후 저지사격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중공군들이 돌출고지 정상을 향해 맹렬하게 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자, 일단 그곳의 2소대를 철수시킨 뒤 돌출고지 진지에 [[TOT]] [[진내사격]]을 지시해 적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새벽 4시 50분경에는 주 진지에서도 백병전이 치열하게 전개됐고, 그렇게 피말리는 40분이 경과된 5시 30분 경 적들이 패주했고, 6시경엔 돌출고지까지 다시 확보했다. 하지만 적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3연대 6중대의 406 고지를 노리기 시작했다. == 406 고지 전투 (7.23 ~ 7.24) == 7월 23일 밤 10시,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고지로 올라오는 중공군 소대를 상대로 쟁탈전을 벌여 격퇴했다. 7월 24일 오전 3시 10분, 공격준비사격 후 중공군 대대 병력이 후속 공세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이규학 6중대장이 중공군 포격에 전사하고 만다.[* 이후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직후 시작된 난전으로 수습할 수 없었고, 정전 후에도 군사분계선 때문에 발굴할 수 없어서 국립현충원엔 그가 생전에 남겨놓은 머리카락과 손톱만 안장된 상태다.[[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4738|#]]] 오전 4시경 우측의 1소대 진지가 피탈당했고, 나머지 소대들도 위태로웠다. 그리고 오전 4시 30분, 버티기 힘들어진 6중대는 후사면에 집결해 병력을 수습한 뒤 7중대의 엄호 속에 철수했다. 오전 5시경 6, 7중대의 엄호 속에 1대대 2중대가 탈환을 개시했는데, 그나마 다행히 일출이 시작되면서 포격 지원이 용이해졌고 무엇보다 중공군의 추가 증원도 없었기에 격퇴할 수 있었다. == 그리고 휴전까지... (7.24 ~ 7.27) == 406고지를 끝으로 정전 협정 때까지 이렇다 할 공세는 없었으나, 정전 협정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이 두 고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장병들은 탄식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내려와야 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승리로 인해 [[군사분계선|휴전선]]이 35km나 끌어올려졌고, 댐을 포함한 [[파로호]]를 온전히 우리 땅으로 지켜낼 수 있었기에 난전 중 사망한 160여명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 여담 == * [[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64575|이영선 국방일보 기자에 따르면]] 영화 [[고지전(영화)|고지전]]은 이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악어중대를 현존하는 특정 부대 소속으로 할 경우 생길 명예훼손 문제, 몰입도 등.]로 상당 부분이 [[각색]]되었는데, 일례로 악어중대는 3연대 1중대이나 국군에 존재하지 않는 10사단 예속이다. 또한 중공군 대신 북한군을 자주 상대한다. 게다가 현실에선 악착같이 사수하다 정전 협정 결과에 피눈물을 쏟으며 내려와야 했으나, 영화에선 정전 협정 때 한 명을 빼면 모두 사망한다. * 이 전투의 주역인 8연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뒤, 부사관이 되어 3연대 10중대의 [[행보관|행정과 보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여순 사건]]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맞서 싸우나 6월 30일 허벅지를 관통당해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이후 8연대로 와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한 [[평양 전투]][*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이 이어지던 때 국군 [[제1보병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평양 돌입을 다투고 있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험삼아 평양에 가장 근접한 황해도 수안까지 진격한 7사단에 평양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특명을 하달해 8연대의 중대 하나가 평양으로 진격한 것이다.]에 참여한 뒤 [[평안남도]] [[개천시|개천]] 비호산에서 중공군과 11월 내내 [[격전]]한다.([[개천-비호산 전투]]) 이 과정에서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11월 15일 소위로 [[현지임관]]한다.[* 그리고 이 무렵 "전투는 상하간의 신뢰로 이루어진다. 지휘관은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 또한 지휘관은 전투에 전념하고 집중해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며 희생을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신조를 스스로 세우고 이를 지키고자 여기저기 선두로 나다니게 되었는데, 이에 따른 불만도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51년 1월엔 영월지구 전투의 적 병참선 차단작전에 참가한다. 하지만 5월 국군의 6.25 내 최대의 흑역사인 [[현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북송되기 전인 6월 25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미 24사단 지역으로 탈출한다. 이후 원대복귀해 1대대 작전교육 담당으로 있다 [[양구군|양구]] [[백석산 전투]][* 7사단과 8사단이 백석산 일대를 장악한 북한 12, 32사단과 2개월간 벌인 [[고지전]].]에서 1중대장이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1중대를 지휘한다. 이후 6월에 벌어진 [[M-1고지 전투]]에선 938 (선우)고지 쪽을 맡았으며, 7월에 이 425고지를 인계받아 전투를 하게 것이다. 그 뒤 정전 협정이 채결되고 몇 달이 지난 53년 12월, 김 대위와 용사 9명은 경무대로 초청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56년 대위로 예편한 뒤 2012년 4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에 육군은 육군장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https://news.joins.com/article/8041967|#]] * 또한 406고지에서 전사한 이규학 3연대 6중대장을 기려 3연대 2대대는 2016년 3월 이규학 대대로 명명식을 가졌다. * [[http://www.dnc.go.kr/html/kr/medi/toon201409/wtn1_1.html|이 전투를 소재로 한 단편 웹툰]]이 [[국립대전현충원]] 공모전에 출품, 입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