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other1=제로니모,rd1=제로니모)] [include(틀:서방교회의 4대 교부)] || [[그리스어]] ||Εὐσέβιος Σωφρόνιος Ἱερώνυμος || || [[라틴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 || [[영어]] ||Saint Jerome || ||<-2> [[파일:external/lh4.ggpht.com/St%20Hieronymus%20by%20Van%20Dyck.jpg|width=100%]] || || 생몰년도 ||347년~419년/420년 || [목차] == 개요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는 [[기독교]]의 [[성인(기독교)|성인]]이다. 이름의 [[그리스어]] 발음을 한글로 옮기면[* 코이네 기준.] '에우세비오스 히에로뉘모스' 정도가 된다. 고전 [[라틴어]]로 읽으면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정도가 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대중 라틴어로 읽어서 흔히 '예로니모'라 한다.[* 예로니모 본인도 고전 라틴어가 아니라 [[불가타|대중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했으므로, 이는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제롬]](Jerome)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이 보통 이렇게 표기한다. 그들은 [[불가타]] 역시 영어식으로 벌게이트라고 표기.] 축일은 [[가톨릭]], [[루터교회]], [[성공회]]에서는 [[9월 30일]], [[정교회]]에서는 [[6월 15일]]. == 생애 == 347년 [[판노니아]] 국경 근처의 [[달마티아]] 속주 스트리돈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기독교인 부모의 영향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으나 뒤에 이교를 믿었다. 그러나 큰 병을 앓은 후 회심하여 [[수도회|수도공동체]]에 입회하였다가 [[안티오키아]]에서 온 한 사제의 영향으로 동방[* 당시의 관점에서는 [[팔레스타인]]/[[아프리카]] 또는 [[동유럽]] 지방.]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또 [[사제]]로 [[성품성사|서품]]되었다.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부름을 받고 그의 비서사제 생활을 하며 [[성경]] 번역 겸 해설가 직무를 맡았다. 이때 교황은 그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임을 알고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70인역]] 성서를 번역대본으로 삼아 새로운 [[라틴어]]역을 펴냈다. 그러나 70인역 성서와 히브리어 필사본을 검토한 뒤 좀 더 원전에 가까운 문서를 번역대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다마소 1세]]의 [[선종(가톨릭)|선종]]한 뒤 389년 무렵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세우고, 예수 성탄 성당 지하동굴에서 제자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키움 모녀(母女)의 도움으로 히브리어 성서를 토대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본을 예로니모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과 합본하여 '[[불가타]](Vulgata) 성서'라는 이름으로 가톨릭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라틴어 성경하면 보통 불가타 성서를 말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가타 성서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위 각주에 나온 전설을 신봉한 나머지, 개인의 번역이 어떠한 귄위도 없다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예로니무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어 그의 불가타 번역을 비판했다] 그 외 [[니케아 공의회]] 때 결정된 니케아 신경의 핵심인 [[삼위일체론]] 교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삼위의 각 페르소나(위격)개념 정리를 더 구체적으로 정립했는데, 당시 그 누구 보다 삼위일체에 관한 깊은 고찰과 깨달음으로, 이를 바탕으로 후일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정통 기독교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와 부활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종 후 그의 작업실이었던 동굴에 매장되었으나 후에 [[십자군]]들이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성모설지전 성당)으로 이장하였다. 성인은 유언으로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잠들기를 바란다." 하는 말을 하였고 관에 새기기까지 했는데, 십자군 [[뭥미]]... 예로니모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기독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며. 성인이 쓴 성서와 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로니모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1세|대 그레고리오]])이자 [[교회학자]]이다. == 전설 == 대개 [[이콘|성화]] 중에서 삐쩍 마른 노인이 사막 한가운데나 동굴에서 고행하고 있는 그림이면 99% 예로니모를 그린 그림이며 거기에다가 돌을 쥐고 가슴을 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면 100%인데, 사막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가슴을 돌로 쳤다고 전한다. 또한 [[중세]]에는 [[추기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빨간 추기경 모자를 쓰고 있는 성화도 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St.%2BJerome.jpg]] 예로니모는 [[사막]]에서 고행을 하며 신앙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고행하던 중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있는데, 사자가 가만히 낑낑거리고만 있어 자세히 보니 발에 가시가 박혀있어 뽑아주었더니, [[개냥이|이후 사자가 예로니모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고로 성화 중에서 삐쩍 마른 노인과 그를 애완동물마냥 쫄쫄 따라다니는 사자가 나온다면 예로니모를 그린 게 확실하다고 보면 되며 서재에서 책을 쓰는 그림에도 사자가 따라붙어 있다. 불가타 성경을 쓸 때 불경하게도 자신이 이전에 심취한 [[그리스 로마 신화]]나 유명 문학 작품들의 문체를 인용해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천국에서도 그 죄 때문에 [[미카엘]] 천사에게 후드려 맞고 있을 거라는 농담이 있다. 특히 본의 아니게 이 사람에게 능욕(...)당한 성인이 한 명 있는데, 그 바닷물 가르는 기적으로 유명한 [[모세]]다. 모세의 외양을 묘사한 [[히브리어]] 원전에는 "...[[모세]]의 머리가 빛으로 둘러싸여..."라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빛과 뿔이 거의 표기가 비슷한 바람에 예로니모가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나 있어..."라고 오역해버렸다. 게다가 구약성경의 문화에서 뿔은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그럴 듯했다. 그 때문에 수백 년 간 예술가들이 모세를 그릴 때마다 [[뿔]]을 그렸는데, 머리에 흉악스럽게 뿔이 난 건 악마들뿐이니 작고 귀엽게(?) 묘사했다. 제일 유명한 케이스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모세 성상. 물론 예로니모의 번역을 수정한 '노바 불가타'에서는 이 유명한 오역을 원전에 맞게 수정하였다.[* [[출애굽기]] 34:39 - "... quod cornuta esset facies ..."(불가타), "... quod resplenderet cutis faciei suae ..."(노바 불가타), "... 자기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된 것을 ..."(공동번역). 출애굽기 34:35 - "qui videbant faciem egredientis Mosi esse cornutam ..."(불가타) "Qui videbant cutem faciei Moysi resplendere ..."(노바 불가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면 그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공동번역).] [[분류:교회학자]][[분류:교부]][[분류:고대 로마/인물]][[분류:가톨릭 수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