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황후]][[분류:아시아의 섭정]] [include(틀:역대 청 황후)] ||<-2><tablealign=right><tablewidth=350><tablebordercolor=#00386a><tablebgcolor=#00386a> {{{#fecd21 {{{+1 '''孝定景皇后[br]효정경황후'''}}}}}} || ||<-2><#fff> [[파일:효정경황후.png|width=100%]] || ||<width=50> '''[[호칭|{{{#fecd21 봉호}}}]]''' ||<bgcolor=#fff>'''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 || || '''[[시호|{{{#fecd21 시호}}}]]''' ||<bgcolor=#fff>효정륭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br](孝定隆裕寬惠慎哲協天保聖景皇后) || || '''{{{#fecd21 출생}}}''' ||<bgcolor=#fff>[[1868년]] [[1월 28일]] [[청나라|청]] || || '''{{{#fecd21 사망}}}''' ||<bgcolor=#fff>[[1913년]] [[2월 22일]](45세)[br][[중화민국]] [[베이징시|경조지방]] [[자금성]] 서육궁 태극전[br]{{{-1 (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자금성]])}}} || || '''[[능묘|{{{#fecd21 능묘}}}]]''' ||<bgcolor=#fff>숭릉 || ||<|4> '''{{{#fecd21 재위}}}''' || '''{{{#fecd21 청의 황후}}}''' || ||<bgcolor=#fff> [[1889년]] ~ [[1908년]] [[12월 2일]] || || '''{{{#fecd21 청의 황태후}}}''' || ||<bgcolor=#fff> [[1908년]] [[12월 2일]] ~ [[1913년]] [[2월 22일]] || ||<-2><bg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tablewidth=100%><tablebgcolor=#00386a> '''[[본관|{{{#fecd21 성씨}}}]]''' ||<bgcolor=#fff>예허나라(葉赫那拉) || || '''{{{#fecd21 부모}}}''' ||<bgcolor=#fff>예허나라 규양[* 서태후의 오빠다.], 아이신기오로씨 || || '''{{{#fecd21 형제}}}''' ||<bgcolor=#fff>2남 3녀 || || '''{{{#fecd21 부군}}}''' ||<bgcolor=#fff>[[광서제|청 덕종 경황제]] ||}}}}}} || [목차] [clearfix] == 개요 == >'''"내 어찌 [[청나라#s-10|일개 성씨]]의 존영을 위하여 억조 인민의 호오를 저버리겠는가."''' >---- >선통제의 퇴위조서를 발표하면서.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황후이자 청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의 마지막 [[황태후]]. 이름은 정분(靜芬). 일반적으로 융유황후(隆裕皇后)로 알려져 있으며 시호는 효정륭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孝定隆裕寬惠慎哲協天保聖景皇后)이다. [[서태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효정경황후의 아버지인 예허나라 구이샹(葉赫那拉 桂祥)는 서태후의 이복 동생이다. 또한 실질적으로는 청나라, 아니 중국사의 마지막 황후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음 대인 선통제의 아내인 [[효각민황후]](완룽)은 [[청나라 소조정]] 시절인 1922년에 결혼했으며,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의 [[위안스카이]]는 제대로 된 황제 취급도 못 받았기 때문에 그의 아내들도 황후로 인정받지 못했다. 즉 공식적으로 황후 자리에 올라서 황후-황태후의 권위를 가져본 인물은 그녀가 마지막이다. == 생애 == [[서태후]]가 고모였던 관계로 [[광서제]]는 원치않은 혼인으로 융유황후를 싫어하였으며 융유황후는 자신의 황후지위와 황태후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하여 [[광서제]]의 후궁들을 괴롭혔다. 이런 문제 때문에 광서제 사이에서의 자녀는 없었다. === 제국의 황혼 ===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승하하자 [[선통제]]의 모후가 되어 경친왕의 보좌를 받아 이미 기울대로 기운 청나라를 맡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진압을 명하였으나, 사령관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쑨원]]과 협상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당시 어린 선통제를 대신하여 청 황실 우대 조건을 내걸고 퇴위 조서를 반포한다. 이로써 [[1616년]] [[천명제]]가 세운 후금에서 출발한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는 [[1912년]]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우대조건에 따라 자금성의 내조는 여전히 청 황실이 사용하고, 황실은 자금성에 남을 수 있게 되어 계속 기거한다. 이것이 바로 [[청나라 소조정]]이다. === 사망 === 융유태후는 이듬해인 1913년 2월 22일 자금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청 황조가 멸망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것으로 추정한다. 융유태후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선통제]]에게 남긴다. > '''"그대는 제왕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느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나라는 이미 망해버렸소. 이제는 이 어미마저 죽을 참인데 그대는 아직 망연하기만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나와 그대는 이제 영원히 이별하오. 앞길이 순탄치 않을 텐데, 그대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오. 나는 더이상 그대를 지켜줄 수 없으니 말이오."''' 중국의 신문인 대공보에서 융유태후를 추모하는 글이 유명하다. > 제왕에게 기대지 않고, 수렴청정을 한 바도 없이, 양보의 미덕과 고상한 마음으로 4억 국민에게 따뜻한 은의를 주었다. 예전에 국체를 바꾸지 않아 점점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자이니, 자고 이래로 융유태후만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융유태후가 서거하자 위안스카이는 융유태후에게 여중요순(女中堯舜, 여인 중의 요, 순 임금)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융유태후의 장례는 중국사에서 마지막으로 행한 황후의 장례식이기도 했다. == 미디어에서 == 흔히 황후이던 시절에는 [[광서제]]를 핍박하고 그의 후궁들을 모질게 대하는 추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BTV]]에서 방영한 중일합작 드라마 [[창궁의 묘]]에서 그런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황태후가 된 후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르다. 쓰러져가는 왕조를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안쓰러운 모습이다. 외모 또한 이에 맞게 기품있는 분위기의 미인 배우가 배역을 맡는 편. [[건당위업]]이나 [[말대황제전기]] 등을 보면 창궁의 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동일인물인지도 모를 정도다. 건당위업에서는 [[판빙빙]]이, 말대황제전기에서는 후이잉훙(惠英紅)이 효정경황후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