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1.jpg]] [[https://blog.naver.com/jungyoupkim/221269327933|사진 출처 : KBS 역사스페셜 - 로마유리 신라에 오다]] [목차] == 개요 ==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의 북분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신라]]의 [[유리구슬]] 제조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5.jpg]] [[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4.jpg]] 거푸집과 함께 발견된 황남대총 북분의 유리구슬들.[[http://blog.daum.net/kinhj4801/15960029|사진 출처 : 1600년 비밀의 문을 연 황남대총]]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거푸집으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총 7만여점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4~5세기 경 신라인들이 [[유리구슬]]을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리]] 생산과 관련된 자료가 출토된 유적은 서울 [[풍납토성]]을 시작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여러 곳이 있으나 이 유물은 그 중에서도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리작품으로 따진다면 이보다 더 이전의 것으로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 합송리 유리 관옥이 있긴 하지만 이 유물은 푸른빛이 나는 긴 대롱형으로 [[납]]-[[바륨]] 성분을 포함한 전형적인 [[중국]]의 유리제품이기 때문에 [[규소]], [[나트륨]], [[칼슘]]이 주성분인 소다석회유리로 만드는 한국제 유리를 주조하는 도구로는 이것이 최초라 할 수 있다. [[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2.jpg]] [[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3.jpg]] [[파일: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6.jpg]] 3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켜 주변국의 경계를 벗어나 [[지구]] 반대편의 [[서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과 교역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고대 로마]]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 형식의 유리제품들도 다수 수입되었다. 이후 신라인들은 [[서양]]인들을 통해 자체적으로 유리 제조기술을 습득, 송풍관과 유리 슬래그를 만들고 유리구슬을 생산하는 공방을 다수 운용하였는데 이때 자주 사용하던 도구들이다. 신라는 유리구슬을 제작할 때 원석을 가공하는 방법과 유리용액을 부어 만드는 방법 2가지를 사용했다. 전자의 경우 반용융 상태의 유리를 막대에 감아 만드는 방식이었고, 후자의 경우 방형 점토판에 작은 구멍을 [[벌집]] 모양으로 뚫고, 구멍 중앙에 침으로 세울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뚫은 형태의 거푸집을 만든 후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꺼번에 많이 만드는 양산형 방법이었다. 전자의 경우 유리의 품질이 좋아 [[귀족]]층이 주로 사용하였고, 후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유리의 질은 떨어지지만 값싸게 양산이 가능하여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이 거푸집들은 후자의 방법으로 구슬을 만들 때 사용하던 것이다. 이렇게 거푸집으로 만드는 양산형 구슬들은 주로 수정제 구슬을 비롯해 청색, 감색, 황록색 마노구슬 등이 있었고, 조금 신경을 쓴 경우 [[금(원소)|금]](金)과 [[은]](銀) 구슬 사이를 장식하고 모양과 색깔을 다채롭게 꾸민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금박(金箔)을 씌운 후 표면을 다시 유리로 감싼 금박(金箔)구슬도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의 유리 제조 방법은 [[신라]]가 멸망한 후 언제부터인가 [[로스트 테크놀로지|기술이 완전히 실전]]되었다.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조선]]시대에는 [[보석]]인 [[수정(보석)|수정]]을 깎아 유리 대용으로 사용했고 1902년 이용익(李容翊)이 국립유리제조소를 건립하기 전까진 국내 제조 기술이 없었다. [[분류:신라의 공예]] [[분류: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