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용인시 출신 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국장]] || 성명 ||홍금만(洪今萬) || || 생몰 ||[[1879년]] ~ ? || || [[출생지]] ||[[경기도]] [[용인시|용인군]] || || 사망지 ||미상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홍금만은 [[1879년]]생이며 [[경기도]] [[용인시|용인군]] 출신이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음력 7월 19일에 [[정철화]] 의병장의 의병부대 30여 명이 그의 마을을 지나가며 “의병은 적당을 제거하고 의거하여 보국안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죽산군·충주군·청주군 등지를 다니며 항일 투쟁을 수행하던 중 충주 방여탄에서 일본 군병과 교전하다가 피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08년 음력 2월 9일 [[박춘식(1871)|박춘식]]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에 가담하여 [[유태수]]·[[송금봉]] 등과 같이 용인 성산리 존위(尊位)와 마가실(麻柯室) 존위 집에서 화승총 값으로 각각 400여 냥을 거두고,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 같은 해 음력 2월 10일에는 박춘식·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강원도 김봉기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용인 성산리 존위와 이가(李哥)의 집에서 군자금 480냥을 거두고, 마가실(麻柯室) 이공록(李公祿)의 집에서도 군자금 450냥을 모금하였으며, 광주 전지리 서낭청(徐郎廳)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된 그는 1908년 6월 17일 경기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홍금만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