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일본의 역사)] ||<-3><tablebgcolor=#ff4500><tablealign=right> '''{{{#fff {{{+1 헤이시 정권(平氏政権) [br] 헤이케(平家)}}}}}}''' || ||<-2><bgcolor=#fff> [[파일:타이라씨 가몬.svg|width=120]] || ||<-2> '''[[가몬(일본)|{{{#fff 가몬}}}]]''' || ||<-3> '''{{{#fff 1167년 ~ 1185년}}}''' || || '''{{{#fff 위치}}}''' ||<-2><bgcolor=#fff>[[혼슈]], [[규슈]], [[시코쿠]]|| || '''{{{#fff 수도}}}''' ||<-2><bgcolor=#fff>[[교토시|헤이안쿄]](平安京)[* [[1180년]]에 약 5개월 간 [[후쿠하라|후쿠하라쿄]](福原京, 오늘날의 [[고베시]])를 수도로 삼았으나 곧 헤이안쿄로 복귀했다.]|| || '''{{{#fff 정치체제}}}''' ||<-2><bgcolor=#fff>무가정권|| || '''{{{#fff 국가원수}}}''' ||<-2><bgcolor=#fff>[[천황]]|| || '''{{{#fff 정부 수반}}}''' ||<-2><bgcolor=#fff>[[태정대신]] → 내대신|| || '''{{{#fff 주요 실권자}}}''' ||<bgcolor=#fff>[[타이라노 키요모리]][br][[타이라노 무네모리]]|| || '''{{{#fff 언어}}}''' ||<-2><bgcolor=#fff>중세 [[일본어]]|| || '''{{{#fff 문자}}}''' ||<-2><bgcolor=#fff>[[한자]], [[가나 문자]]|| || '''{{{#fff 종교}}}''' ||<-2><bgcolor=#fff>[[대승 불교]], [[신토]]|| || '''{{{#fff 종족}}}''' ||<-2><bgcolor=#fff>[[일본인]]|| || '''{{{#fff 화폐}}}''' ||<-2><bgcolor=#fff>송전(宋錢)[* [[송나라]] 화폐]|| || '''{{{#fff 주요사건}}}''' ||<-2><bgcolor=#fff>1167년 [[타이라노 기요모리]]의 [[태정대신]] 임명으로 수립[br]1180년 [[겐페이 전쟁]] 발발[br]1185년 [[단노우라 전투]] 패배로 몰락|| ||<-2> '''{{{#fff 성립 이전}}}''' || ||<-2><bgcolor=#fff> [[인세이]] || ||<-2> '''{{{#fff 멸망 이후}}}''' || ||<-2><bgcolor=#fff> [[가마쿠라 막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헤이케(平家)는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중심으로 한 '[[이세]] [[타이라|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의 정권을 가리키는 말.[* 사실 겐페이 전쟁이 바로 겐지와 헤이케 가문의 내전을 일컫는 말이다.] 헤이시(平氏) 정권이라고도 하고 본거지인 키요모리의 저택이 [[교토]](당시에는 헤이안쿄)의 로쿠하라(六波羅)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로쿠하라 정권이라고도 불린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가 [[이세]]에 자리를 잡은 것을 집안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고레히라의 증손자인 마사모리(正盛)의 대에 와서 [[시라카와 덴노]]의 인세이 아래 중용되었고,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치카[* 겐지의 도료로 신망이 높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아들이다]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면서 무사 가문으로써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러한 이세 헤이시의 대두 과정 자체가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미나모토|겐지]] 가문을[* 또한 겐지는 전통적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셋칸케를 배제하려는 시라카와 덴노로서는 미나모토 가문을 배제하기 위해서도 다른 무사 가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견제하기 위한 시라카와 덴노의 계략이었다는 해석이 정설.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C%9D%B4%EC%A7%80%EC%9D%98_%EB%82%9C|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승리를 거두고, 키요모리는 그 지위를 높혀 전국에 500여 개의 장원과 각종 공경 벼슬을 독점하여 헤이시 정권을 형성한다. 헤이케는 해상 세력이기도 했는데[* 반면 헤이케의 숙적이었던 겐지는 척박한 간토 지방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상전에 능하였다.], 대 송나라 무역을 독점하고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현재의 [[고베]]에 무역을 위한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 키요모리가 이 섬을 만들 때 난항을 겪자 주변에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다의 신에게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 것"이라며 [[인신공양]]을 권했지만 키요모리는 "다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불경을 적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덤으로 이 돌로 매립공사까지 했다) 공사 중에 해가 저물려고 하자 해에게 명령해 저물지 말고 다시 뜨라고 했더니 해가 지지 않고 조금 그 자리에 멈춰서 비치고 있었다고도 한다.]를 건설했으며, 역시 고베에 후쿠하라쿄(福原京)의 건설과 [[천도]]를 시도하기도 했다.[* 천도 자체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고베는 키요모리 '''사후 800년이 지난''' 2016년 지금도 일본의 국제무역항으로써 번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키요모리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 본인은 상당한 능력자였지만, 헤이케 안에는 '''키요모리를 능가 혹은 그에 비길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없어''' 키요모리 사후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 세력에 밀리고 패배하며 멸망했다. 헤이케 측의 장원과 영지는 몰수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따르는 무사들에게 재분배되었다. 요리토모는 헤이케 잔당들에 대해 철저한 보복을 가했는데, 이세 헤이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키요모리의 동생으로 요리토모에게 귀순한 요리모리에[* 키요모리와는 배가 달랐고, 생모가 죽은 자기 아들 이에모리와 닮았다며 요리토모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키요모리에게 부탁했던 것도 있어서 요리토모가 우대했다고.] 의해 가문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다. 각지에서 "헤이케의 도망자 전설"이 만들어지게 된다.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이나 [[쓰시마]]의 [[소(성씨)#s-2|소]] 가문도 모두 이 당시 도망친 헤이케 도망자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平家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라는 유명한 고사가 바로 헤이시 정권 시기 때 나온 말이다. 키요모리의 처남인 토키타다가 한 말인데 [[불새/난세 편]]에서는 대놓고 키요모리 본인이 토키타다에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왜 하냐"고 깐다.[* 토키타다 이 사람은 헤이케가 서쪽으로 낙향할 때도 동행했지만 단노우라 전투 때 포로로 잡혔고, [[삼종신기]]의 하나인 신경(神鏡) [[야타노카가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보호했다는 점을 감안해 처형은 면했다.] 교만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키요모리 본인은 낮은 사람들한테도 잘 대해 주는 것으로 신망이 높았다. == 역대 수장 == || 대수 || 이름 || 집권 기간 || || 1대 || [[타이라노 키요모리]] || 1167 ~ 1181 || || 2대 || [[타이라노 무네모리]] || 1181 ~ 1185 || == 여담 ==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의 헤이시 정권을 무가 정권의 선도적인 형태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를 다룬 문학으로 [[헤이케모노가타리]]가 있다. 13세기에 성립된 이래 수많은 문학과 회화, 연극 작품 등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도 곧잘 주석본이 나오는 [[삼국지연의]]급 고전. [[겐페이 전쟁]]에서 실제 역사와 달리 헤이케가 승리해서 정권이 계속 이어지거나 헤이케가 막부를 창건한다는 가정은 일본의 대체역사물에서 상당히 소재로 많이 활용되어서 로쿠하라 막부나 로쿠하라 시대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우라타로]]가 있다. 이때문에 창작물에서 가상의 [[막부]]가 나올때는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처럼 헤이케와 별 관련이 없어도 [[로쿠하라 막부]]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분류:헤이안 시대]][[분류:타이라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