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3년 출생]][[분류:1972년 사망]][[분류:네덜란드의 축구선수]][[분류:네덜란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의사]][[분류:나치당원]][[분류:나치 부역자]][[분류:슈츠슈타펠/인물]][[분류:전쟁범죄자/나치 독일]]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6600><tablebgcolor=#fff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8533 5%, #FF6600 15%, #FF6600 85%, #FF8533 95%);" {{{#000,#e5e5e5 '''헤유스 판데르묄런의 역임 직책'''}}}}}} || || {{{#!folding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ee7c1a> '''{{{#2115a5 네덜란드 축구 국가 대표팀 역대 주장}}}''' || ||<width=30%> 헹크 페르메턴[br](1930) || {{{+1 →}}} ||<width=30%><bgcolor=#ffffff,#191919> '''{{{#d4001f 헤유스 판데르묄런[br](1931~1933)}}}''' || {{{+1 →}}} ||<width=30%> [[푸크 판헤일]][br](1934~1938) || }}} || [[파일:Gejus van der Meulen.jpg]] || 이름 || 아헤아우스 이머 "헤유스" 판데르묄런[br](Ageaus Yme "Gejus" van der Meulen) || || 생년월일 || [[1903년]] [[1월 23일]] || || 사망년월일 || [[1972년]] [[7월 10일]] || || 국적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28]] [[네덜란드]] || || 출신지 || [[암스테르담]] || || 포지션 || 골키퍼 || || 신체조건 || 183cm / 72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코닝클러크 HFC (1922-1935)''' || || 국가대표 || 54경기 (1924-1934)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https://thesefootballtimes.co/2015/08/18/gejus-van-der-meulen-story/|풋볼타임즈]]] == === 선수 생활 === ==== 클럽 ==== 판데르묄런은 1922년 네덜란드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구 클럽인 코닝클러크 HFC[* Koningklijke HFC, 1879년 창립. 지금은 보잘것없이 쇠락했지만 네덜란드의 축구 클럽 중 유일하게 코닝클러크(왕가의. 영어로는 royal, 스페인어로는 real)를 사용하는 클럽이다.]에서 데뷔했다. 1935년까지 HFC에서 활동한 [[원 클럽 플레이어]]지만 클럽에선 단 한번도 우승컵을 들어보지 못했다.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 판데르묄런은 1924년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1924 파리 올림픽|파리 올림픽]]에도 참가해서 네덜란드가 4위의 성적을 올리는 데에 주전 골키퍼로서 기여했다. 4강전에서 남미의 강호이자 대회 우승팀이 될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잘 싸웠지만 후반 36분, [[엑토르 스카로네]]에게 [[페널티 킥]] 결승골을 내주며 1대2로 패배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 올림픽]]은 그의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1라운드부터 또 우루과이를 만났고 이번엔 0대2로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판데르묄런은 1931년부터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장이 되었고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에도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네덜란드의 첫 월드컵 대표팀은 골키퍼들끼리의 마찰로 삐걱대고 있었다. 당초 선발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선수는 [[아드리안 판말러]]와 게리트 케이저르였지만 케이저르는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판데르묄런과 [[레오 할러]]가 선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판데르묄런은 [[밀라노]]에서 아내와 따로 데이트를 즐겨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에 2대3으로 패했고 이것이 판데르묄런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 그의 커리어 통산 A매치 기록은 54경기 출전, 100실점이며 전적은 19승 12무 23패이다. 이 기록은 [[한스 판브뢰켈런]]이 돌파하기까지 56년이 걸렸다. === 나치 부역 문제 === 판데르묄런은 현역 시절엔 네덜란드 축구계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였다. 대표적인 예로 폴리혼 주르날[* Polyhoon Jounal. 일종의 네덜란드 식 [[대한뉴스]]와 비슷한 개념이라 보면 된다.]에 그의 결혼식 장면이 실릴 정도였다. 그는 1933년부터 하를럼에서 [[소아과]] [[의사]]로 활동했지만 그 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바로 '''나치 부역'''.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나치 독일|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지 조금 지난 1940년 9월, 판데르묄런은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NSB]]에 가입했다. 1941년에는 [[슈츠슈타펠]]에도 가입했고 1942년에는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오라니엔부르크]]에서 [[군의관]]으로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로 인해 종전 이후 판데르묄런은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1947년에 그가 재판을 받게 될 때 기자 헤르만 퀴포프(Herman Kuiphof)는 대놓고 "een wrak, een geslagen hond(비참하게 패배한 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할 정도였다. 1948년에 판데르묄런은 재판을 받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지만 1년 후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후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병원에 손님이 찾지 않은 것은 당연했고 1949년 아들이 참가하는 친정팀 HFC의 축구 경기를 보러 갔는데 판데르묄런 또한 팀의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냉대 그 자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