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m1.daumcdn.net/206AF64B50101D5A0C26CD?.jpg]]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br]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행복을 주는 사람 가사 中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br]우리들의 사랑으로[br]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 사랑으로 가사 中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포크#s-3|포크]] 듀오. [[1977년]]에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의 4인조로 결성되었으나 1979년 2집에는 이주호가 탈퇴하고 [[이광조]]가 합류했다. 이후 1982년 이주호는 유익종과 함께 2인조 체제의 해바라기를 새롭게 결성했고, [[1983년]] 정규 1집을 냈다. 이주호가 이끄는 듀오 '해바라기'와 이정선, 한영애가 주축이 된 4인조 '해바라기'는 별개의 존재.[* 물론 이주호의 해바라기가 4인조 해바라기에서 파생된 것은 맞지만, 1983년 듀오 해바라기의 결성 이후에도 [[1986년]]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그리고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김영미가 해바라기라는 이름으로 정규 3집을 내며 다시 활동한 바 있기 때문에 둘은 구별하는 것이 옳다. 참고로 이때 이정선이 작사, 작곡해 수록한 '우리네 인생'은 후에 [[김현식]]이 리메이크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주호, 유익종 2인의 원년 듀오 멤버가 [[1980년대]] 중반을 산 사람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져 있을 텐데, 해바라기의 대표곡인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어서 말을 해''', '''내 마음의 보석상자''', '''너''' 등이 전부 이 두 명이 활동할 때 처음 발매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대표곡인 '''사랑으로'''는 유익종이 팀을 나와 솔로로 전향한 뒤 이주호와 이광준이 함께 활동할 때인 [[1989년]] 발매된 것이다. 상기했듯 유익종이 탈퇴한 이후로는 이주호가 팀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한 명의 멤버만 몇 번씩 바뀌었다. 이광준, 심명기, 그리고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팀을 거쳐갔으며, [[1999년]]부터 지금까지 강성운이 이주호[* 아들이 '썬플라워 리퍼블릭 91'의 싱어송라이터 '이상'(본명 이상수)으로, [[미국]]에서 [[회계사]] 공부를 하면서 음악 활동을 병행했다. 공부하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를 놀라게 했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재능을 선보였다고 한다.]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지금이야 [[콘서트 7080]]의 단골 가수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통기타]]를 배우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였던 __1980년대의 청춘들에겐 해바라기의 음악은 거의 [[바이블]] 수준__이다. 서정적인 기타 음률에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약간 꿈을 바라는 듯한 노래는 그 당시 청춘들 뿐만 아니라 전 연령에 걸쳐 사랑받았고 그만큼 명곡들이 많다. '행복을 주는 사람'은 경연 프로그램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사골 수준으로-- 리메이크되며 젊은 층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사랑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이상을 바라는 노래로 발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 곡이며(풍자적인 억지 감동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김범수(1979)|김범수]]의 진지한 리메이크도 이루어진 적이 있고 '어서 말을 해' 같은 경우에는 2012년 [[국카스텐]]이 잔잔한 마이너 포크 발라드를 --차마 따라할 수 없는 [[하현우|고음]]을 곁들인-- 사이키델릭 하드 락으로 편곡해 불러서 화제가 된 바 있다. == 대표곡 〈사랑으로〉에 대하여 == 해바라기의 대표곡 〈사랑으로〉의 가사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이주호가 작곡을 하고 [[1986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서울 아시안 게임]] 때 발표하려 했으나 가사를 완성하지 못했고,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989년]] [[2월 27일]] [[서울]]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공항동에서 부모가 집에 없는 사이에 4자매가 생활고 등을 이유로 [[독극물|음독]]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머니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져 막내딸은 사망,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중태에 빠졌다가 나중에 회복해서 퇴원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채 2분도 걸리지 않아 가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연쇄진학 부모님부담" 어린 4자매 자살 기도''' > >27일 하오(오후) 2시 30분쯤 서울 강서구 공항동4의43, 김원묵 씨(52) 집 지하셋 방에서 양태범 씨(44)의 큰딸 순미 양(14) 둘쨰딸 정미 양(10) 세째딸 은미 양(8) 막내딸 세원 양(6) 등 4자매가 생활고를 비관한 끝에 극약을 마시고 신음중인것을 어머니 김옥순 씨(36)가 발견, 병원으로 옮겼으나 막내딸은 숨지고 나머지 3명은 중태다. > >어머니 김 씨에 따르면 하오 2시쯤 집근처 가게에서 쌀을 사갖고 돌아와보니 네 딸이 방안과 지하실입구 등에 쓰러져 신음중이고 막내아들(2)은 방안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 > >큰딸은 안방책상위에 묵은달력을 뜯어 「엄마, 아빠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걱정마세요. 나쁜딸 올림. 부모님께」라는 내용의 유서를 검은색 사인펜으로 써놓았다. > >큰딸 순미 양은 병원에서 "집안 살림이 어려운데다 나는 중학교에 새로 입학하게 되고 네째도 올해 국민학교에 진학하게 돼 집안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동생들과 함께 극약을 마셨다"고 말했다. > >아버지 양 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비산업주식회사에서 [[생산직|공원]]으로 일하면서 월25만원 정도의 수입으로[* [[2020년]] 물가로 환산해도 200만원이 채 안 되는 수입이다.] 6명의 식구를 부양해 왔으며, 지난 87년 4월부터 이집 지하실방 2칸을 8백만원에 전세내 살아왔다. > >부모들은 경찰에서 "큰딸과 둘째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해 우등상을 탈 정도로 학교 성적이 우수했으며 평소 명량한 성격으로 이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 >ㅡ [[경향신문]], [[1989년]] [[2월 28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22800329211006&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2-28&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362&publishType=00020|기사 원문]][* [[동아일보]] [[1989년]] [[2월 28일]] 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22800209215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2-28&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742&publishType=00020|기사에도 있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나는 가수다]]에서 [[김범수(1979)|김범수]]가 리메이크를 할 때 리메이크는 허용했으나, 음원 발매는 허용하지 않았는데, 방송에서 김범수의 무대를 보고 음원 발매를 허용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해바라기, version=110)] [[분류:한국 남가수/ㅎ]]